[푸드투데이 = 조성윤기자] <편집자 주> 기업, 소비자, 국가까지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전 인류를 덮친 코로나19 대유형이 잠잠해지기가 무섭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했고 튀르기예는 참혹한 지진을 이겨내는 중이다. 세계적인 경제둔화로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고 있다. 오너의 성격과 자질, 상황, 운(運)기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인류사처럼 기업사도 일정한 주기가 있다. 이 세상에 없던 것, 혹은 익숙한 것에 혁신을 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형적인 것을 구체화시켜 유형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야한다는 점에서 한국전쟁 직후나 고도화된 사회는 똑같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무엇보다 실물경제 회복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식품.유통기업으로 우뚝 선 기업의 오너들은 어떻게 회사를 일구어냈을까. 푸드투데이는 창간 21주년을 맞아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오너들의 메시지를 전한다.
인류의 역사는 달콤한 것을 탐닉하려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한국전쟁으로 쓴맛을 본 한국인들은 단맛을 더욱 갈구했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 보들거리고 폭신한 감촉의 빵과 입안에서 살살 녹는 크림이 조화를 이룬 맛, 크림빵은 10원에 판매됐다.
스물네살의 황해도 청년, ‘상미당(賞美堂)’의 주인이 되다
양산빵부터 파리바게뜨까지 빵의 대중화 시대를 연 허창성 SPC그룹 회장은 1921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항일 의병으로 참전한 부친으로 가세가 기울자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14살의 어린나이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과점에서 제빵 기술을 배우게 됐다. 점원으로 일했던 허창성은 광복이 되자 일본인이 떠난 동네에 그동안 배웠던 제과 기술을 바탕으로 황해도 옹진에 ‘상미당(賞美堂)’이라는 작은 빵집을 열었다.
24살의 젊은 허창성은 ‘상미당(賞美堂)’은 ‘맛있는 것을 주는 집’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에게 즐거운 맛을 선사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미국은 한국에 엄청난 양의 밀가루를 무상으로 원조했다. 1970년 중반까지 미국의 식량원조 계획에 따라 학교에서 옥수수 빵을 무료로 나누어 주는데 이때부터 빵은 일반대중에게 친숙한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분식 장려운동으로 빵의 소비는 늘어났고 전국적으로 동네 빵집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덩달아 제빵 기술자는 인기업종으로 떠올랐다. 전쟁 이후였기 때문에 숙식 자체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제과점은 기본적으로 숙식을 제공했고 제빵업계 발전의 기폭제가 되었다.
장사가 잘되자 허창성은 서울 을지로 방산시장 부근으로 '상미당'을 옮기고 본격적으로 빵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서울에는 고려당,태극당 등 유명 제과업체가 이미 열 군데가 넘게 있었다. 이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뭔가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결국 허창성은 빵을 굽는 가마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연료비를 10분의 1수준으로 낮춘 무연탄 가마를 개발해 빵 값을 대폭 낮추었다.
가격경쟁력으로 큰 성공을 거둔 허창성은 1959년 삼립제과공사를 설립한다.
사르르 녹는 부드러운 맛, 삼립의 구원투수가 된 10원짜리 크림빵
허창성은 1959년 용산에 삼립제과공사(삼립식품)를 설립하면서 기업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어 1963년 서울 신대방동에 공장을 준공하며 본격적인 빵 생산에 나섰다. 동네 제과점에서 빵을 만드는 가내수공업적 단일 생산이 천편일률적인 상황에서 허창성이 공장에서 빵을 생산하는 양산빵을 선보인 것이다.
그리고 빵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크림빵'을 생산하게 된다. 1960년대 전후 분식장려 운동이 펼쳐지면서 당시 각 학교에 배급되던 옥수수 빵이 밥을 대신할 수도 있다는 개념을 만들게 된다. 크림빵은 196∼70년대 구로공단 야근 노동자들에게는 허기를 달래 주었으며, 그리고 외화 벌이를 위해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난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모국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음식 역시 크림빵이었다.
'하이면'과 '아이차'로 제빵 비수기 탈피...그리고 불후의 명작 '호빵'
허창성은 빵만 일색인 사업구도에서 탈피하기 위해 '삼립제면공업'을 설립하고 '하이면'을 선보였다. 이 제품은 기름에 튀기지 않은 습면이자 장기보존이 가능한 우동이었다. 일반 건면에 비해 담백했고 간편했다. 1974년 탄생한 국내 최초의 튜브형 빙과 제품인 '아이차'는 여름철 비수기를 탈출하기 위해 내놓은 제품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출시 당시 일 18만개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유사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며 국내에 빙과 열풍이 불기도 했다.
1964년 크림빵 대히트 시킨 후 신제품 개발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 해 겨울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가게마다 따뜻하게 데워 팔던 찐빵을 본 허 회장은 제빵업계의 비수기에 팔 수 있는 제품이라는 생각으로 호빵의 제품화를 시도한다.
1969년 신제품 개발 연구팀을 꾸렸다. 하지만 호빵을 제품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가정이나 분식집 등에서 판매하고 있던 찐빵이 이미 겨울철 간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황 탓도 있지만 결정적 원인은 덥혔을 때 찜통에서 갓 나온 촉촉한 식감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호빵 대중화의 핵심이 되는 ‘찜통’이라는 난제를 1년 만에 해결한 1971년 '호빵'이 소개됐다. 호빵이라는 이름은 ‘뜨거워서 호호 분다’, 그리고 ‘온 가족이 웃으며 함께 먹는다’라는 의미로 임원회의에서 결정된다.
호빵이 출시됐을때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삼립의 효자였던 ‘크림빵’의 독주를 넘볼 정도였다. 호빵은 당시 빵 값인 5원 보다 4배나 비싼 20원이었음에도 빵 판매원들은 공장에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을 벌였다. 하루 160만개를 팔아치운 날도 있었다.
첫 출시는 1971년 10월이었다. 호빵은 ‘뜨거워서 호호 분다’, ‘온 가족이 호호 웃으며 함께 먹는다’는 의미를 담아 붙인 명칭이다. 출시된 해의 12월 하루 평균 출하량이 100만개를 넘어서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당시 빵값인 5원보다 4배 비싼 20원이었지만, 소매상들은 공장 앞에 줄을 섰다.
호빵 대중화의 핵심은 ‘찜통’이었다. 가게들은 직접 쪄야 팔 수 있어서 번거롭다는 이유로 제품 자체를 받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1972년 개발된 연탄을 활용한 원통형 찜통이 소매점에 배포되면서 호빵 시대가 본격화했다. 허창성은 자신이 맡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한 장인이었다.
또, 케이크의 특징을 대중화시킨 ‘보름달’ 출시하게 된다. 보름달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에 대중은 다시 열광했다. 보름달은 제빵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호부호자(虎父虎子), 허영인 회장의 파리바게뜨
삼립이 승승장구하던 1992년 허창성은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큰 아들에게 삼립식품을 물려주고 둘째아들에게는 매출규모가 10분의 1정도인 삼립의 자회사 '샤니'를 물려주게 된다. 허영인 회장은 IMF로 회사가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되자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개그맨 김국진을 캐릭터로한 ‘국찐이 빵’을 출시했는데 대히트를 치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그러나 회사를 물려받은 큰 아들 허영선은 리조트 사업을 무리하게추진하면서 결국 삼림식품은 최종부도 처리되자 허영인이 삼립을 인수하게 된다. 허영인 회장은 1986년 서울 반포동에 ‘파리크라상’을 오픈하고 우리나라 최대의 프랜차이즈 빵집 파리바게뜨로 새로운 제빵사업을 시작한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제과점 파리바게뜨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허영인 회장이 이끄는 SPC그룹은 파리바게뜨를 비롯해, 던킨, 파스구찌, 베스킨라빈스 등 소비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을 견뎌 여기까지 왔다. 상급학교 진학을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
병석의 아버지는 내게 "일본 사람의 종이 되지 말고 기술을 배워 자립하라"고 말씀하셨다.
무급으로 기술을 배우며 성실과 신용의 힘을 배웠다.
전시 상황으로 겪어야했던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어떻게 다 말로 옮기랴, 시국 탓만 하면서 움츠려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만든 빵을 부산에 있는 사람도, 광주에 있는 사람한테도 똑같은 맛과 품질로 먹게 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
그 생각의 발단이 오늘날 회사를 만든 것이다. 동네 빵집이었던 상미당(賞美堂)의 기적이다.
초당(草堂) 허창성 1921-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