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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투데이 22주년 창간기획]유통공룡의 이력서...이명희 신세계 총괄회장

[푸드투데이 = 조성윤기자] 그 여자는 '경단녀'였다.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막내딸로 태어나 사업가 아버지의 신임을 받고 자랐다. 부자 아빠가 애지중지하는 예쁜 막내딸, 여기까지 흔히 볼 수 있는 스토리다.

 

이화여대 생활미술과를 졸업하고 스물 다섯이 되던 해에 서울 공대 출신의 삼호방직 회장의 차남, 정재은씨와 결혼, 정용진 신세계 그룹 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 남매를 낳았다. 그리고 12년간 전업주부로 살았다. 

 

가정생활에 한창이던 어느날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백화점 사업부를 맡아서 운영해보라"는 지시를 내린다.  '용진이 엄마' 이명희는 경영에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 이병철은 "앞으로는 여성도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는 끈질긴 설득을 했다. 결국 그녀는 1979년 영업담당 이사로 신세계에 입사한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불혹을 앞둔 30대 후반이었다.

 

남편의 월급봉투를 의지하면서 마흔을 바라보는 가정주부였던 경단녀, 아줌마 이명희. 당시 삼성의 계열사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신세계 백화점. 아버지 이병철은 장녀 이인희에게도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했다.

 

언니 이인희의 한솔그룹은 아직도 방황 중이고(물론 한솔그룹 주력 사업인 제지업이 사양산업으로 된 것은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이명희가 이끄는 신세계그룹은 상위권이다.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그녀가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며, 홀로 외로운 싸움을 얼마나 거듭했는지 유통공룡으로 통하는 찬란한 신세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버지 이병철, 내겐 너무 예쁜 막내딸...이명희
이병철 회장은 생전 인터뷰에 "명희가 남자였다면 삼성그룹을 맡겼을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아버지 이병철은 경영자인 자신의 장점과 배우자인 박두을 여사의 유연함을 닮은 이명희를 대견케 생각했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이병철 회장은 골프모임은 물론 재계 인사들과 친목을 다지는 자리에 이명희를 대동했다. 그때마다 "나를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이라는 공공연한 칭찬을 했다. 아버지 이병철 회장은 딸 명희의 화술과 패션감각을 누구보다 높이 사고 자랑스러워 했다. 

 

제일모직을 창업할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고 다정다감한 성격인 이병철의 장점을 닮아 '리틀 이병철'이라고도 불렸던 이명희. 이건희 회장은 "명희는 평범한 듯 하지만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트렌드에 민감한 유통.식품업계에 필수적인 감각이다. 

 

'명희'는 아버지를 통해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산세계 그룹이 삼성가에서 분리된 후에도 자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저력을 보여줬다. 신세계 그룹이 재계에서 성공하는 바탕에는 인맥의 영향도 컸다. 

 

 

'슬픔은 위기 아닌 기회', 고난 없이 피는 꽃은 없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명희는 장미꽃 처럼 자랐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정체성과 짙은 향기를 드러내기 위해 저 혼자 고난을 여러번 겪고 가시까지 있는 장미는 마냥 아름답기만 한 꽃이 아니다. 이명희는 평소 아버지 이병철의 메모하는 습관을 닮아있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새로운 상품을 보면 메모해 뒀다가 상품개발팀에 전달했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1987년, 부모이자 멘토. 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이명희 회장은 마음의 안식처를 잃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잊기 위해 미국에 체류하면서 뜻밖의 기회를 잡았다. '슈퍼마켓과 편의점, 재래시장은 즐비했지만 '대형마트'라는 개념이 없었던 한국에 그녀가 국내 최초의 할인마트 이마트를 1993년 세운 계기다.

 

이명희는 미국의 프라이스클럽과 월마트 등 창고형 점포를 둘러보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으로 가능성을 확인했다. 

 

'리틀 이병철' 그 여자의 철칙 "직책을 줬다면 전적으로 신뢰"
이명희 회장의 통큰 사람 경영은 이병철 회장과 맞 닿아 있다.  이 회장은 아버지로부터 사람 경영법을 배웠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첫 출근 전날 아버지 이병철은 전쟁터에 참전 하는 이명희에게 서류에 사인하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세인이 듣기에는 사인을 하지 말고 책임을 피하라는 것 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속 뜻은 "나 아닌 적임가에게 맡겼으면 전격적으로 신뢰하고 대신 믿지 못할 사람은 아예 쓰지 말라"는 뜻이다.

 

이렇게 사람을 믿는 경영은 삼성가에선 불문율처럼 내려온다. 사업은 돈을 벌기도 하지만 사람을 버는 것이라는 철학. 재계에서는 한 번 연을 맺은 사람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가를 증명해주는 혜안으로 손 꼽힌다. 1993년 처음 선보인 서울시 도봉구 창동의 이마트는 신세계가 유통 강자로 자리매김하는 원동력으로까지 발전한다.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 범삼성가의 저력

국내 유통시장에 뛰어든 지난 98년 당시 월마트의 순매출액은 무려 165조원(1180억달러)에 달했다. 반면 93년 이마트를 오픈했던 신세계의 매출액은 1조8000억원. 100분의 1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8년 뒤. 월마트는 국내 사업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매장을 통째로 신세계에 팔아 넘겼다.

 

1999년은 이명희 회장에게 중요한 시기였다. 월마트에 맞설 방안을 고심하던 이마트는 사운을 건 모험에 뛰어든다. 기존의 창고형 매장을 철저히 거부하고, 국내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한국형' 매장을 선보인 것. 20호점 산본점이 그 효시였다. 진열대 높이를 한국인 키에 맞게 낮추고, 매장 환경을 백화점처럼 고급스럽게 꾸몄다. 또 상품수를 3~5만개로 늘리고 낱개로 판매했다. 약국과 사진관, 푸드코트 등 편의시설도 입점했다.

 

변신은 기대 이상의 대성공이었다. 소비자들은 이마트로 발길을 돌렸고, 새로운 매장은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이마트의 도약으로 세계적인 유통체인인 월마트가 결국 이마트에 밀려 한국에서 철수하고 그 월마트를 이마트가 인수하면서 신세계는 유통공룡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리고 2005년 978호점 죽전점을 통해 신개념 '복합형' 할인점을 선보인 것이다. 테마별 전문매장을 만들고, 레스토랑을 입점했다. 상품수는 6만개가 넘었다. 천장을 높이고, 동선을 넓혀 쇼핑 환경을 더욱 개선해 복합 쇼핑공간을 선보인다. 

 

2000년 오픈한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단일 유통 시설 사상 최초로 3조 원의 연매출(단순 거래액 합산 총액)을 올렸는데 소비자의 체험 요소를 강화하는 데 주력한 것이 비결로 꼽힌다. 2016년에 소비자들이 다양한 품목과 브랜드를 한 곳에서 비교하기 쉽도록 '전문관' 시스템을 도입했고 2018년에는 팝업 전용 공간 '더 스테이지'를 도입해 백화점업계의 표준으로 자리 잡게 했다. 

 

신세계그룹과 계열사들의 성공은 나열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고의 유통그룹이다. 

엄한 어머니...하지만 정 많고 따뜻한 휴먼 '이명희'
톱스타였던 미스코리아 출신 배우 고현정의 시어머니로도 유명한 이명희, 아들인 정용진이 고현정과 이혼한 후 한동안 방황하자, 정신차리라는 뜻에서 매일 아침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서 당시 개점을 앞두고 있던 이마트 양재점까지 뛰어서 출근하도록 시킨 적이 있다는 후일담은 유명하다. 

 

육체가 정신을 지배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 한겨울 추위 속에서 몇 개월 간 극기 체험을 통해 정용진 부회장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업무에 충실해졌다는 일화는 재계에서 제법 유명한 이야기다. 감성적인 이야기가 아닌, 과학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때로는 궁금해진다. 너무나도 힘들던 시기, 그녀도 자신이 가시밭길을 헤쳐나오기 위한 몸부림 끝에 나온 처방이 아니었을까. 
 
미술학도답게 경영인이 되어서도 취미로 그림을 직접 그리기도 하고, 1년에 2번은 꼭 유럽과 뉴욕에 해외여행을 가서 패션 및 건축 트렌드를 직접 알아보려고 하고, 갖고 싶은 물건은 사진을 찍어서 어떻게든 몇 개월 안에 구하고 한때는 6개월간 사내 사보에서 활동을 했다.

 

아들 정용진 회장에게 신세계를 맡긴채 총괄회장으로 한 벌 물러난 이명희가 꿈꾸는 신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이명희 회장만큼 높이 키우기 힘들다는 것을 아는 정용진 회장은 높낮이 대신 깊이를 선택한 듯 하다. 이명희의 신세계를 이어받은 정용진의 신세계가 쇼핑문화의 저변을 어떤 색으로 확대 시킬지 기대되는 이유다.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말을 못하고 있으면 늘 지갑을 열고 
돈 전부를 쥐어준 것도 명희였고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하면 마지막까지 내 편을 들어서 
아버지를 설득하려 한 것도 명희였다. 
도망자 생활을 하던 시절에도 나는 경제적으로 명희 덕을 많이 봤다. 
-이맹희, <묻어둔 이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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