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투데이 = 조성윤기자] <편집자 주> 기업, 소비자, 국가까지 모두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전 인류를 덮친 코로나19 대유형이 잠잠해지기가 무섭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했고 튀르기예는 참혹한 지진을 이겨내는 중이다. 세계적인 경제둔화로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고 있다. 오너의 성격과 자질, 상황, 운(運)기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지만 인류사처럼 기업사도 일정한 주기가 있다. 이 세상에 없던 것, 혹은 익숙한 것에 혁신을 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무형적인 것을 구체화시켜 유형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야한다는 점에서 한국전쟁 직후나 고도화된 사회는 똑같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무엇보다 실물경제 회복이 절실한 상황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식품.유통기업으로 우뚝 선 기업의 오너들은 어떻게 회사를 일구어냈을까. 푸드투데이는 창간 21주년을 맞아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오너들의 메시지를 전한다.
"농심은 농부의 마음이고 흙의 마음이라고 하셨던 선대 회장님은 노력한 것 이상의 욕심을 내지 않으셨다. 수 십 갈래의 알 수 없는 길 중 남들이 가지 않은 험난한 길을 골라서 묵묵히 걸었던 그분의 길을 따르겠다."
당시 부회장이었던 신동원은 92세 일기로 별세한 신춘호 농심 회장의 영결식에서 신춘호 회장이 물려준 정신적인 유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농심은 신동원 회장의 취임과 함께 기업 슬로건을 '인생을 맛있게'로 바꾼다. 신춘호 회장이 생전 주장했던 신뢰받는 품질과 맛, 식품 안전에 대한 철학을 유지하면서 소비자들의 희노애락,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하고 싶다는 의미다.
장남인 신격호 롯데회장의 뜻을 거스르고 이룬 성공, 후발주자로 시작한 사업에서 철옹성 점유율을 역전시킨 승부사, "스스로 서야 멀리 갈 수 있고,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라면은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사업을 성장시킨 신춘호 회장도 하루의 고단함을 따뜻한 라면 한 그릇으로 위로받지 않았을까?
배고픔을 달래는 식품에서 한국인의 기호를 한 스푼 추가한 '라면'
율촌 신춘호회장은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진수 공과 모친 김필순 여사의 5남 5녀중 셋째 아들이다. 1954년 김낙양 여사와 결혼하여, 신현주(농심기획 부회장), 신동원(농심 회장), 신동윤(율촌화학 회장), 신동익(메가마트 부회장), 신윤경(아모레퍼시픽 서경배회장 부인) 3남 2녀를 두었다.
1958년 대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성공한 장남 신격호회장을 도와 함께 일을 했지만 1963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했다. 신춘호회장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른속도로 진행되던 일본의 식문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 일본은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었다. 신 회장은 "저렴한 가격에 한국인의 입맛에 맞고 주식이 될 수 있을정도로 양도 충분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킨 라면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서른다섯살 신춘호, 1965년, 대방동에서 만든 라면의 새 역사
신춘호 회장은 1965년 35세의 나이로 자본금 500만원으로 현재의 농심 사옥이 있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신대방동에 라면 뽑는 기계를 들여놓고 라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왈순마’는 농심(당시 롯데공업주식회사)이 후발 주자였던 농심 삼양식품과 치열한 라이벌 관계에서 입지를 넓혀가는 큰 역할을 했다. 1968년에는 베트남전쟁 당시 군수 물자로 수출됐다. 모델은 배우 강부자였다. 삼양과 한판 승부를 벌이기 위해 ‘왈순마’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롯데제과에서 별사탕을 제공 받아서 라면 안에 넣고 라면 120개 먹으면 탁상 시계를 주는 마케팅을 진행했다. 또, 당시 거금 750만원 상당의 경품을 걸고 ‘왈순마’ 홍보행사를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대히트를 기록한 왈순마에 이어 농심은 닭고기 육수 대신 한국인이 좋아하는 소고기를 활용한 소고기라면을 1971년 출시,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인기인이였던 곽규석과 구봉서 콤비를 내세워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카피를 이용해 라면시장을 흔들었다.
1978년 3월 회사 이름을 농심으로 변경했다. 신춘호회장은 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두었다. 당시 라면산업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면 제품 개발이 수월했겠지만, 농심만의 특징을 담아낼 수도,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매운맛이 한국인의 기호를 대표하는 맛이라고 생각하는 신 회장은 전국의 유명한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양념장을 연구했다. 앙념장 한 숟갈로 화끈하게 매워질 수 있는 매운맛을 찾기 위헤 직접 나서는 것은 물론, 직원들과 함께 라면 스프에 매달렸다.
세계를 홀린 한국인의 매운맛, 농심의 역작 '辛라면'
제품 봉지에 '매울 신(辛)'자가 새겨진 라면, 젊은 세대들에게 '푸라면'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신라면은 개발 당시에 주변의 반대에 부딪혔었다. 신라면이 나오기 전만 해도 한국에서 라면은 매우면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신춘호는 오히려 '매운맛'을 전면에 내세워야겠다고 판단했다. 틈새시장을 공략한 셈이다.
제품명도 맵다는 의미의 '신(辛, 매울 신)'을 사용했으며, 광고 카피 또한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이라며 맵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품명부터 광고 카피까지 신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했다. 1986년 출시된 신라면의 출시 가격은 200원. 여타 브랜드의 라면이 100원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고가였다.
고가 정책에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으나 제품력이 무기인 신라면은 날개 돋친 듯 판매됐다. 신라면은 출시 첫해에만 3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1987년에는 18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농심의 간판 라면이 됐다.
해외에서도 인기다. 외국인들이 한국의 매운맛 라면에 도전하는 '먹방' 콘텐츠가 온라인상에 확산되면서 덩달아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신라면은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라면 1위이며, 수출액은 4400억원을 돌파했다.
라면쟁이에서 스낵쟁이로...세상에 내놓은 첫 번째 자식 '새우깡'
새우깡 역시 신춘호 회장이 탄생부터 유통까지 관여를 한 제품이다. 한국에서 최초의 스낵이라고 평가받는 새우깡은 출시 초기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당시 대방동 공장에는 새우깡을 가져가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트럭들로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첫해 생산량이 20만6000박스에 불과했지만 그다음 해는 20배가 증가한 425만상자가 생산됐다. 1971년 당시 새우깡이 가격은 50원(100g)이었다. 1971년 당시 제과업체들은 비스킷과 사탕, 건빵 등을 주로 생산했다. 스낵이 전무후무한 시절 백지상태에서 개발을 시작한 농심 연구원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연구원들이 1년간 밤을 새워가며 연구에 몰두했는데 사용된 밀가루 양만 4.5톤 트럭 80여대분에 이를 정도였다. 밀가루가 많이 들어간 이유는 농심 연구원들이 새우깡의 시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튀김 온도가 적절치 않아 수도 없이 제품이 그을렸기 때문이다. 가장 적당한 강도를 유지하기 위한 실험도 수백 번이나 했다고 한다.
수백 번의 시행착오 끝에 농심은 가열한 소금의 열로 새우 반죽을 구워 만드는 방식을 고안했다. 기름에 직접 튀기지 않아 기름지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부풀어 올라 특유의 바삭한 조직감을 구현할 수 있었다.
새우깡 특유의 고소한 맛을 내기 위해 생새우를 넣었다. 실제로 새우깡 한 봉지에는 5~7㎝ 크기의 생새우 4~5마리가 들어간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소한 새우 소금구이 맛을 살리자는 게 제품의 개발 콘셉트였다.
새우깡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농심은 1976년과 1978년 인디안밥과 바나나킥을 잇따라 시중에 선보이면서 스낵 명가로 우뚝 서게된다.
왈순마부터 짜파게티, 사발면까지...농심의 페르소나 '안성댁' 강부자
넉넉한 인심에 후덕한 풍체로 끓이는 라면, 탤런트 강부자는 ‘라면은 농심이 맛있습니다’라는 카피로 1981년부터 무려 1994년까지 13년 동안 광고모델로 활약했다. 안성탕면과 신라면, 짜파게티 등 강부자는 대부분의 제품에 광고모델로 활동했다.
1984년 3월 출시된 '짜파게티'의 1대 모델도 코미디언 구봉서와 함께 활동한 강부자였다. 짜장면으로는 대체 불가능한 독자적인 맛의 영역을 만들어낸 짜파게티는 볶음라면류의 상위권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강부자는 1984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8년간을 짜파게티의 모델로 TV에 등장했다.
지금은 짜파게티라는 브랜드명이 익숙하지만 출시 당시에는 세상에 없던 신선한 네이밍이었다. 짜파게티는 짜장과 스파게티의 합성어다. 짜장면의 최대 소비층인 어린이들의 관심을 끄는데 효과적인 이름이었다. 짜파게티는 감각적인 네이밍으로 소비자들의 눈길을 단번에 끌었다.
농심은 온가족과 함께 먹는 음식, 인스턴트지만 영양까지도 생각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어머니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강부자를 선정했고 결과는 대성공이 었다. '안성댁'이라는 애칭을 안겨준 안성탕면의 얼굴도 강부자였다. 경기도 안성의 지명에서 따온 안성탕면은 소비자에게 친근감을 더해주기 위한 지역명에 푸근하고 인심 좋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지닌 강부자를 모델로 내세웠다.
안성탕면이 유명세를 탄 데에는 강부자가 출연한 광고도 한몫했다. 안성탕면의 흥해으로 농심은 1985년 국내 라면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른다. 안성탕면은 1983년 출시와 동시에 1987년 매출 442억원, 점유율 12.9%로 삼양라면을 제치고 시장 1위 브랜드로 올라섰다.
'오동통통,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라는 카피로 유명한 라면 '너구리'와 '신라면'의 광고에도 강부자는 함께했다. 1986년 육개장 사발면의 광고에서도 지금은 여의도 공원이된 여의도 광장에서 강부자는 인심 좋은 매점 주인으로 출연해 육계장 사발면의 편의성을 알린다. 그저 뜨거운 물을 붓고 3분만 기다리기만 하면 완성되는 조리법은 당시에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육개장 사발면과 함께 김치 사발면이 자매품으로 소개됐다.
1988년은 올림픽이 열린 해, 강부자는 "사발면은 이제 국경도 없어졌어요"라는 말을 한다. 강부자의 말은 사실이 됐다. 올림픽 이후 육개장 사발면은 더 이상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수출을 시작했다.
신춘호 회장의 장례식에도 비통한 표정으로 참석하기도한 강부자는 한 토크쇼에 출연해 "지금도 다른 라면은 먹어 본 적이 없다"고 농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 남자의 경영 철학 "남의 것을 모방 말고 우리가 제일 잘하는 것을 하자"
신 회장은 제품를 출시할 때마다 농심의 세계화를 꿈꿨다. 농심은 미국 시장에서 '한국의 맛'을 그대로 가져가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현지 제품을 모방하지 않고 농심의 맛 그대로 시장에 선보였다. 신라면을 출시할 당시 그는 미국에 이미 진출해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 라면과 유사한 제품을 출시하면 단기적인 매출을 가져올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브랜드가 사라지리라 판단했다.
농심이 해외 매출은 지난해 9억 9000만 달러(1조 1261억 원)에 이르며 세계 5위 라면 기업으로 도약했다. 미국 시장에 법인을 세우고 24년 만에 주류시장(백인·흑인 중심의 미국 현지 소비자) 매출이 아시안 시장을 앞질렀고, 2020년 기준 주류시장 점유율이 62%로 아시안 시장(38%)을 압도했다.
‘품질’의 중요성도 자주 강조했다. 1990년 해외 수출을 앞두고는 "최고의 품질인 만큼 프리미엄의 이미지를 확보하자. 한국의 맛을 온전히 세계에 전하자"고 독려했고, 2021년 신라면 블랙 출시를 앞두고는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신 회장은 2018년 중국의 인민일보가 신라면을 '중국인이 사랑하는 한국 명품'으로 선정했을 때,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가 신라면 블랙을 세계 최고의 라면 1위에 선정했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평생 라면을 만들어왔으니 라면쟁이요, 스낵도 만들었으니 스낵쟁이라고 불리는 것이 나는 좋다.
돌이켜보면 시작부터 참 어렵게 꾸려왔다. 밀가루 반죽과 씨름하고 한여름 가마솥 옆에서 비지땀을 흘렸다. 내 손으로 만들고 이름까지 지었으니 농심의 라면과 스낵은 다 내 자식같다.
배가 고파 고통받던 시절, 내가 하는 라면사업이 국가적인 과제 해결에 미력이나마 보탰다는 자부심을 가져본다. 산업화 과정의 대열에서 우리 농심도 정말 숨가쁘게 달려왔다. 이제는 세계시장을 무대로 우리의 발걸음을 다그치고 있다.
농심의 가족들이 쌓아온 소중한 경험과 힘을,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순수하고 정직한 농부의 마음으로, 식품에 대한 사명감을 가슴에 새기면서 세계로 나아가자
신춘호 회고록, <철학을 가진 쟁이는 행복하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