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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 기름 한 방울 없다?”…70년 식용유史, 수입 의존의 민낯

전쟁 직후 미국 원조기름부터 대두유 전성기, 저온압착 트렌드까지
GMO 논란·수입의존 구조·전통기름 부활 등 한국 식탁의 변화 추적

 

[푸드투데이 = 황인선기자] 우리 식탁에서 식용유는 언제부터 당연한 재료가 됐을까. 참기름 한 방울로 풍미를 냈던 시절을 지나 대두유로 볶고 튀기던 산업화의 시대, 그리고 건강을 우선시하는 저온압착 오일의 부상까지. 식용유 한 방울에 담긴 70년의 변화는 한국인의 식생활을 관통하는 중요한 단서다. 6·25 이후 한국 식용유 산업과 식문화 변화, 원료 수입 구조, GMO 논쟁, 전통 기름의 현재까지 한국 식용유의 70년, 그 격동의 흐름을 짚는다.<편집자주>

 

전쟁과 함께 온 기름…한국 식용유의 첫 등장

 

한국 사회에서 식용유가 본격적으로 식탁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 이후였다.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초반, 미국의 구호물자(PL480)로 옥수수기름, 쇼트닝, 마가린 등 서구식 식용유 제품이 대거 유입되면서다.

 

당시 대부분의 한국 가정은 기름 없이 조리하는 식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조리법은 구이, 찜, 삶기, 무침, 조림 중심으로, 기름은 일부 참기름이나 들기름 등 향미용으로만 제한적으로 사용됐다. 튀김은 일부 사찰 음식이나 명절 음식에 국한돼 있었고, ‘프라이’라는 조리 개념 자체가 낯선 문화였다.

 

하지만 전후 원조물자에 포함된 기름류와 밀가루, 설탕 등 서구식 식자재는 점차 일상 식생활의 변화를 유도했다. 특히 옥수수기름과 쇼트닝은 소세지전, 생선까스 등 도시락 반찬용 튀김의 유행과 맞물려 학교 급식과 군 급식을 통해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확산됐다.

 

이는 이후 도시화, 산업화와 함께 가정에서도 프라이팬 요리가 정착되는 전환점이 됐고, 식용유를 ‘요리의 기본 재료’로 인식하게 된 시발점이기도 했다.

 

 

‘해표’와 ‘백설’의 격돌 – 대중 식용유 시대의 개막
1970~80년대, 동방유량과 제일제당의 브랜드 경쟁 본격화

 

1970~80년대는 한국 식용유 시장이 산업화, 도시화, 식문화 변화와 함께 본격적으로 성장한 시기다. 이 시기 '동방유량’과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은 국내 식용유 산업을 선도한 대표 기업으로, 브랜드·기술·유통 경쟁이 본격화되며 대중 식용유 시대가 열렸다.

 

1966년 설립된 동방유량은 1971년 국내 최초로 대규모 식용유 생산 체계를 갖추며, 당시 식용유 시장의 90% 가까운 점유율을 확보했다.

 

1975년 출시된 ‘해표 식용유’는 콩기름(대두유)을 대중화한 대표 제품으로 자리잡았고, 해표는 이후 소비자의 식용유 대명사가 됐다. 동방유량은 이후 사조그룹에 인수돼 현재 사조대림으로 통합됐다.

 

후발주자로 나선 CJ제일제당(당시 제일제당)은 1979년 9월 6일 인천 신흥동 공장에서 ‘백설식용유’를 첫 출하하며 식용유 시장에 본격 진입했다. 이는 제일제당이 설탕, 밀가루, 조미료, 사료에 이은 다섯 번째 소비자용 식품 제품이었다.

 

공장은 하루 대두 처리량 200톤, 연간 콩기름 생산량 1만 3천 톤 규모로 건설됐으며, 국내 최초 ‘윈터링 공법’과 4단계 정제 시스템을 적용해 품질 차별화를 꾀했다. 제일제당은 김혜자를 모델로 한 대대적 마케팅, 투명 용기, 2중 마개 설계, 용량 다양화 등 소비자 맞춤 전략을 선보이며 시장을 빠르게 추격했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전되며 도시락, 급식, 외식 산업에서 튀김과 부침 요리가 보편화됐고, 가정에서도 프라이팬 조리가 일상화되며 식용유 수요가 급증했다. 당시 대다수 가정에서는 무침용 참기름·들기름 외에 볶음·튀김 용도 식용유로는 대두유가 거의 유일했다.

 

1980년 3월, 제일제당은 서울 지역 판매에서 동방유량을 추월했고, 1981년에는 35%, 1984년엔 37%의 시장점유율을 기록하며 시장을 양분하는 주요 경쟁자로 부상했다. 이후 PET 용기 개선, 고급유 시장 진출, 소포장 다양화 등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했고, 2005년 드디어 시장점유율 1위(42%)를 달성했다.

 

 

트랜스지방 경고와 고급유의 부상 – 건강을 선택한 소비자들
1990년대~2000년대, 정제유 중심서 저온압착·카놀라유로 다변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식용유 소비는 양적 성장에서 질적 변화의 시대로 전환됐다. 이전까지는 대두유, 면실유, 팜유 등 대량 생산과 가격 경쟁이 중심이었다면 이 시기부터는 건강, 영양, 원산지에 대한 소비자 관심이 본격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포화지방 함량이 높은 팜유와 쇼트닝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혈관 건강, 비만, 심혈관 질환과의 연관성이 주요 이슈로 부각됐다. 여기에 2000년대 들어 트랜스지방 유해성에 대한 국제적 경고가 더해지며 가공유지 사용에 대한 규제 움직임도 강화됐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카놀라유, 해바라기씨유, 포도씨유, 올리브유 등 고급유가 국내 시장에 속속 진입했다. 이들 식용유는 상대적으로 불포화지방산 함량이 높고, 콜레스테롤 수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주목받으며 가정용과 외식용 시장 모두에서 대체재로 떠올랐다.

 

또한 정제유가 대세였던 기존 시장 구조에서 ‘냉압착’, ‘저온압착’, ‘압착 생들기름’ 등 비정제 고급유류에 대한 소비자 수요가 증가하며, ‘정제유 vs 압착유’ 논쟁이 본격화됐다. 일부 소비자는 기름의 색과 향, 영양 성분 유지 등을 이유로 전통 방식의 기름을 선호했고, 반면 정제유는 산패 방지, 저장성, 조리 안정성에서 우위를 내세웠다.

 

이 시기는 단순한 기름의 선택을 넘어 소비자가 자신의 식습관과 건강 가치관에 따라 기름을 고르기 시작한 변화의 분기점이었다.

 

 

“기름 한 방울도 수입에 의존” – 자급률 1% 미만의 현실과 GMO 논란
해바라기·카놀라·대두유 원료 대부분 수입… 표시제 강화에 업계 긴장

 

한국은 식용유 원료를 사실상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다. 국내에서 소비되는 대두(콩), 해바라기씨, 카놀라, 팜유 등 식용유 주요 원료의 95% 이상이 수입산이며, 국산 유지작물 자급률은 1% 미만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식용유 가격은 국제 곡물·유지류 시세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원재료 대부분이 미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들여오는 대두유, 해바라기유, 팜유이기 때문에 국제 정세나 이상기후, 물류 차질이 곧바로 국내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되는 구조다.

 

대표적 사례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세계 해바라기유 수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던 두 나라의 생산과 수출이 중단되자 글로벌 식용유 시장은 극심한 수급 불안에 빠졌고, 국내에서도 해바라기씨유와 포도씨유 가격이 두 배 이상 폭등했다. 마트 진열대에서 관련 제품이 사라지는 ‘기름 대란’이 벌어졌고, 대체재인 대두유·카놀라유 가격도 줄줄이 인상됐다.

 

국내 식용유 산업은 수입 원료에 대한 의존도뿐 아니라 GMO(유전자변형생물체) 원료 사용 여부를 둘러싼 소비자 불신과 규제 논란에도 직면해 있다.

 

국회 복지위 남인순 의원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우리나라가 수입한 대두, 옥수수, 유채 등 농산물 1,748건, 총 326만 톤 중 GMO 비중은 대두 77.3%, 옥수수 14.3%, 유채 28.0%에 달했다.

 

남 의원은 올해 1월, 간장·전분당·대두유 등 주요 품목을 대상으로 ‘GMO 완전표시제’를 단계적으로 도입하고, 비의도적 혼입까지 관리하는 Non-GMO 표시제를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식품위생법 개정안’과 ‘건강기능식품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정한 기준을 초과해 GMO DNA·단백질이 남아 있거나 원재료가 GMO로 확인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GMO 표시를 하도록 하고, 반대로 비의도적 혼입도 최소화한 제품에 대해서는 Non-GMO 표시를 허용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단, 업계 현실을 고려해 간장, 맥주, 전분당, 대두유 등 주요 품목부터 품목별·단계적으로 적용하는 유연한 방식을 채택했다.

 

이 중 가장 민감한 품목으로는 대두유가 꼽힌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현재 국내 대두유는 제조용 원료 대두의 100%가 GMO인 반면, 간장·주류(맥주) 등 일부 품목은 Non-GMO 원료를 사용하고 있으며, 전분당(물엿, 과당 등) 역시 약 70%가 Non-GMO 옥수수로 제조된다.

 

이로 인해 CJ제일제당, 사조 해표, 대상, 오뚜기 등 주요 식용유 제조사들이 가장 큰 제도 변화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aT 식품산업통계정보(FIS)에 따르면, 지난해 가정용 식용유 소매점 총매출은 3,937억 원으로, CJ제일제당이 1,462억 원으로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조 대림(418억), 사조 해표 (404억), 대상(379억), 오뚜기(272억) 순으로 뒤를 잇고 있다.

 

식품업계는 GMO 표시제 강화가 소비자의 알 권리를 높인다는 점에는 공감하면서도, 정제유 제품 특성상 DNA와 단백질이 남지 않아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DNA나 단백질이 남지 않은 상태에서도 GMO 표시를 한다면 과학적으로 무해한 제품도 소비자가 기피하게 될 수 있다”며 “과학적 안전성 검토 없이 일방적인 표시제 강화는 신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풍미용으로 밀려났던 전통 기름, 다시 부엌 중심으로”
참기름·들기름의 위상 축소와 재조명…프리미엄 오일 시장서 부활 신호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가정 조리용 기름의 대부분은 참기름과 들기름이 차지했다. 볶음, 부침, 나물 무침 등 전통 한식 조리에 널리 쓰이며, 향미와 풍부한 고소함으로 한국 식탁의 기본 조미재료로 여겨졌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후 대두유, 카놀라유, 해바라기씨유 등 값싸고 대량 생산 가능한 수입 식용유의 공세가 본격화되면서 전통 기름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됐다. 여기에 산패가 빠르고, 고온 가열에 약하다는 물성적 한계, 비표준화된 생산 환경, 높은 단가, 유통 기한 문제 등이 겹치면서 참기름·들기름은 점차 ‘풍미용’ 조미기름으로 축소됐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이후 대형마트에서 참기름·들기름의 판매 비중은 급감했고, 일부는 혼합기름 또는 향미유 형태로 가공돼 판매되는 경우도 늘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통방식, 저온압착, 생들기름 등 프리미엄 오일 제품들이 등장하며 전통 기름의 재조명 흐름이 다시 일고 있다. 특히 향과 영양 성분을 최대한 살리는 ‘냉압착’, ‘국산 깨 100%’, ‘HACCP 인증 전통방식’ 등을 강조한 제품이 온라인과 백화점 중심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단순한 회귀가 아닌, 식문화 다양성과 건강 중시 흐름에 따른 ‘전통 기름의 현대적 재해석’으로 볼 수 있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한 ‘로컬 감성 소비’와 미식 트렌드가 맞물리며 참기름과 들기름은 다시금 부엌 한켠이 아닌 주방의 중심으로 복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