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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표시제’ 길을 잃다


‘의무’서 ‘권고’ 개정안 후퇴 등 시련
업계 “영양표시제 실시로 충분” 대립

본래 취지 퇴색 ‘개정’ 또 ‘개정’


지금 전 세계의 나라들이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안고 있는 고민 하나가 있다. 바로 ‘소리 없는 전염병’으로 불리는 비만이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비만 인구는 약 1.6배 증가했다.

지난해 건강보험공단 추계 자료에 따르면 비만으로 인한 사회경제적비용이 총 1조8000억 원에 달했다.

특히 소아 비만은 대부분 성인 비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이 때문에 지난해 지난 4월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어린이 식생활안전관리 특별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통과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개정안이 비만 청소년에 대한 우려가 법안으로 현실화된 것이라고 큰 의미를 두었었다.

의학박사 출신인 안홍준 한나라당 의원이 발의한 이번 개정안은 어린이 기호식품에 영양성분의 함량에 따라 등급을 정해 녹색, 황색, 적색 등의 색상을 표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 때문에 어린이와 학부모들은 손쉽게 좋은 기호식품, 나쁜 기호식품을 구분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개정안은 개정안이 통과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본래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그 모양(?)을 달리하고 있다.

지난달 20일,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는 전년도에 국회본회를 통과한 ‘어린이 식생활안전관리 특별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다시 개정했다.

개정안의 내용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이 어린이 기호식품의 총 지방과 포화지방, 당, 나트륨 등 영양 성분을 녹색, 황색, 적색 등 신호등 색깔로 표시하도록 식품 제조·가공·수입업체에게 ‘의무 규정’하도록 했던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바꿨다.

소비자단체를 비롯한 일부에서는 이는 사실상 시행도 전에 폐지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의무 규정’에서 ‘자율시행제’로 개정안을 밀어붙인 식품업계의 입장은 다르다.

업계에서는 ‘시범사업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의견에 전혀 공감하지 않고 있다.

특히 보건복지부가 ‘신호등 표시제’대상품목에서 제외된 품목을 생산하는 업계는 ‘신호등 표시제’의 거듭 후퇴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시범사업 수준으로 전락 우려

현재 보건복지부가 영양 성분을 녹색, 황색, 적색 등 신호등 색깔로 표시하도록 대상을 삼은 식품은 국민영양조사와 영유아·어린이·청소년 식품섭취량조사 결과에 근거로 어린이가 가장 많이 섭취하는 상위 10개 기호식품으로 했다.

어린이가 기존 영양 표시만으로는 영양성분의 높고 낮음을 이해하기 어려운 복합 영양성분을 함유한 김밥, 햄버거, 샌드위치, 과자, 빵 등 5개 식품이 우선 포함됐다.

반면, 어린이가 건강식품으로 오인할 수 있는 사탕, 빙과류, 탄산음료 등은 표시 대상에서 제외됐다.

특정 영양성분이 많아 적색표시가 불가피한 초콜릿과 발효유, 아이스크림도 제외했다.

아이스크림의 경우 특정 성분으로만 이뤄져 있기 때문에 거의 예외 없이 ‘빨간등’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유다.

특히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햄버거는 대상품목에 포함된 반면 정작 어린이가 즐겨 찾는 햄버거 전문 프랜차이즈 제품은 제외되는가 하면 가게나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빵류는 포함됐지만 대형 프랜차이즈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제빵류는 신호등 표시를 하지 않기로 했다.

특별법상 전국에 100개 이상의 매장을 갖춘 제과점이나 패스트푸드 업체에 한해 연중 90일 이상 판매하는 조리식품의 열량과 당류, 포화지방, 나트륨 등 영양성분을 표시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복지부의 선정 기준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 납득하기 어려운 선정 기준이 이번에 우선 포함된 5개 식품의 목소리를 더 높이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식품업계에서는 보건복지부의 ‘신호등 표시제’를 반박할 자료들을 이미 충분히 준비해 두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영양성분표시제 시행이다.

식품업계는 업계가 자율적으로 표시제를 도입하는 걸 원칙으로 개발 과정에서 정부, 국회, 식품관련 학회, 소비자단체 등 사회 각계각층의 식품 전문가들과의 발전적 논의를 진행해 충분한 사회적 협의를 만들어 내겠다며 소비자들을 직접 설득하고 있다.

또 업계는 이 제도와 관련, 벤치마킹하고 있는 영국 식품기준청(FSA)에서도 전체 가공식품에 적용할 수 없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있으며, EU 의회에서는 2008년 9월 25일 식품의 영양성분정보의 컬러표시방식을 제외키로 결의했음을 들어 부당성을 제기하고 있다.

해외실패 사례 ·역기능 내세워

하지만 무엇보다 식품업계에서는 ‘신호등 표시제’ 도입의 가장 큰 이유가 되는 어린이들의 식생활과 관련된 대사성 질환(비만, 당뇨 등)의 예방과도 관련해 이를 무색케 하는 반박논리도 이미 마련해 보건복지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것과 관련해 식품업계에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이는 바로 서울여대 식품과학부 노봉수 교사다.

노 교수는 어린이들의 식생활과 관련된 비만에 대해 세미나 등을 통해 ‘신호등 표시제’ 도입 취지를 무색케 만들고 있다.

노 교수는 우선 비만이 생기는 원인이 특정 식품에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근거로 많은 의사들이 비만은 잘못된 식습관, 서구화된 음식문화 등의 환경적 요인과 활동량·운동부족, 유전적 요인 등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생겨난다는 주장을 든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비만을 단순히 영양의 문제에만 국한해 원료적 특성에 따라 식품을 평가한다면 어린이들이 특정 식품에 대한 지나친 편견을 갖게 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고 특정 영양성분에 대한 결핍 혹은 역으로 과잉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식품업계가 ‘신호등 표시제’도입에 대해 ‘수용불가’의 목소리를 높이는 또 다른 이유는 이와 관련한 해외의 사례가 없다는 점이다.

앞서 잠깐 나왔지만 ‘신호등표시제’를 처음 도입한 영국의 경우 이를 강제가 아닌 권고사항으로 제시하고 있고, 회사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또 호주, 미국, 캐나다 등에서도 과학적 정확성의 결여와 활용의 한계를 지적하며 이를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제도는 장기적으로 수십조 원의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의 비만을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으로 제안됐지만, 지금까지 진행을 보면 원안에서 많이 뒤로 물러난 상태다.

현재의 추세라면 제자리에 안착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이쯤에도 다른 목소리가 나와도 될 것 같다.

덴마크는 올해 청량음료에 부과하는 ‘소다세’를 도입한 데 이어 초콜릿과 아이스크림 같은 단 식품들에 대한 과세도 추진 중이다.

국민건강을 지키기 위해 루마니아처럼 ‘패스트푸드세’ 도입을 고려하는 곳도 있다.

사실 어린이 비만을 식품업계만이 책임져야 할 문제는 처음부터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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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성분 ‘신호등표시제’란 = 영양 정보를 어린이나 부모가 알기 쉽게 녹색, 황색, 적색 등 신호등 모양으로 표시하자는 것이다.

식품 100g당 혹은 1회 제공량당 함량 수준을 신호등 색깔로 제품에 표시한다.

이 제도는 최근 어린이들이 식생활과 관련된 대사성 질환(비만, 당뇨병 등) 발병이 증가해 이를 예방하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적색은 섭취를 줄여야 하는 영양소 함량이 많다는 의미다.

황색은 해당 영양소가 많지도 적지도 않다는 뜻이다.

녹색은 해당 영양소가 적다는 뜻으로 건강한 식품에 속한다.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영국은 녹색등이 많이 켜진 식품은 판매량이 10% 증가했다.

반면 적색등이 많이 켜진 식품의 판매량은 12%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