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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은실의 맛집 멋집] 구현품

자존심 강한 한정식집

우은실 기자
생일날 아침이었다.

바로 전날에서야 다음날이 생일인지 알아서 그 흔한 미역 꽁다리 하나도 준비하지 못했었다.

빵 쪼가리 한 장도 없는 냉장고 문을 부셔져라 닫고 찬 우유 한 잔으로 아침을 가리면서 괜히 그 시간까지 자고 있는 남편에게 눈 꼬리가 찢어져라 눈을 흘겨주었다.

그래도 명색이 마누라 생일인데 미역국이라도 먹었냐는 소리 한 마디도 없이 아침까지 술 냄새를 펄펄 풍기면서 자는 모습이라니..

집을 나서 합창연습을 하러가면서도 내내 입이 한 자나 부어 있었나보다.
고양시 YWCA여성 합창단에 속해있는 나는 며칠 후로 다가온 합창경연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생일날 미역국도 못 먹고 집을 나선 거다.
노래가 제대로 되겠나...

어거지로 연습을 끝내고 다행히 몇 몇 단원들의 주선으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입에서 나온 음식점 이름이 이구동성으로 ‘구현품’이었다.

무슨 식당이름이 그래..하면서도 정말 맛있다는 말에 마지못해서 따라나섰다.

아줌마들이 맛있다는 데야..

제법 일산지리에 자신이 있었는데도 그 식당은 꼬불꼬불 가는 길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주차장도 없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지, 배는 고프지, 짜증이 있는 데로 나서 무엇을 준다한들 맛있게 먹어질 것 같지 않았다.

겨우 주차를 하고 들어선 실내..깜짝 놀랐다.
남자는 한 사람도 없어 그야말로 여탕 분위기였다.
열 몇 개의 테이블이 아줌마들로 꽉 차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일행이 여섯이었던 우리는 두 테이블에 나뉘어져서 따로 따로 앉아야만 했다.

가뜩이나 불편한 심기에 맘에 들지 않는 메뉴선택, 사실 난 아직까지 철딱서니 없는 입맛 때문에 고리타분한 우리 한식보다는 쌈박한 일식이나 양식, 이태리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본음식이 나오기 전에 식전음식으로 나온 접시들을 본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가격표를 보았다.
이거, 육천 원짜리 맞아?
깔끔하게 국물을 낸 양배추 물김치에 생야채를 싸먹게 만든 밀쌈, 들깨 소스를 이용한 신선한 샐러드, 막 부친 전 몇 조각, 그리고 야들 야들 입에 착 착 감기는 탕평채까지!!

몇 만 원짜리 한정식 집에서도 먹어보지 못 한 것들이었다.
금방 접시가 동이 날 수밖에. 더구나 먹성 좋은 세 사람이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

젓가락을 빨고 기다리다가 나온 본 음식을 보고서 말 많은 아줌마 셋은 아무 말도 없이 먹기만 열중한다.
죽순을 같이 넣어 볶은 표고버섯볶음, 우거지를 양념해서 끓였다가 넣었다는 된장찌개는 어찌나 구수한지 밥을 반공기도 비우지 않아서 동이 났다.

젓갈을 듬뿍 넣어 전라도 특유의 맛을 내는 배추김치,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부쳤다한들 이처럼 맛있을까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고소한 두부부침, 육수에 버무렸다가 양념을 해서 볶는다는 고사리나물, 시금치나물, 또 손님이 주문한 즉시 튀겨 내온 조기새끼까지. 밥 한 그릇을 금방 비워내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 다이어트중인 친구의 남긴 밥을 얼른 끌어당겨 뚝딱 해치웠다.

배가 부르고 나서야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저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실내장식에 ‘구현품’이란 상호에 대한 설명이 담담한 필체의 붓글씨로 씌어져 액자에 담겨있었는데 그 밑엔 친절하게도 ‘여러 사람이 어울려 즐겁게 맛본다. 입에서 입으로 맛을 전한다는 뜻’이라는 부연설명까지 있었다. 개업 육 개월 전에 특허를 신청한 상호란다.

여주인 이성천 씨는 전라도 광주 출신의 친정어머니에게서 금기로 되어있는 제사음식을 음복하면서 음식을 배웠고 결혼을 한 후엔 서울 출신인 시어머니 밑에서 그 솜씨를 완성하였고 공무원이었던 남편의 잦은 손님 접대 자리를 통해 그의 손맛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해서 그녀의 음식에는 전라도의 맛깔스러움과 서울 특유의 깔끔함이 고루 베어있다.

기본 상차림 외에 몇 가지의 메뉴가 있는데 주인 이씨는 진부에서 공수한다는 황태구이(오천 원)를 특별히 권하고 싶다고 했다.

황태를 불리는 것부터 다른 집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이씨는 궁중요리전문가의 황혜성님과 한복녀님께 요리를 배웠다고 한다.

황태구이 외에도 해물이 듬뿍 들어가 있는 해물파전이 팔천 원, 갖은 야채를 넣어 볶은 제육볶음이 만원이다.

구현품의 또 다른 자랑거리 하나는 보통 한정식 집에 가면 사시사철 늘 같은 반찬임을 볼 수 있는데 매일 반찬이 바뀐다는 것이 바로 그 것이다.

아침 일곱 시에 집에서 나와 매일 신선한 재료를 준비하고 직접 요리를 한다는 여주인은 김치와 젓갈, 나물, 전은 매일 재료를 달리해서 내놓고 있는데 점심 때 온 손님이 저녁 때 또 오면 얼른 다른 반찬을 준비하기도 한단다.

또한 일산에 주거하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들이 더러 오지만 특별한 대우를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소박한 주민들이 맛있다고 말 해줄 때가 더 행복하다는 이씨.
종업원을 배려하기 위해 손님이 많은 토요일을 휴일로 정했다는-일이 많은 날에 쉬게 하고 싶었단다- 자상한 마음까지도 소유한 여주인은 주변 주민들에게 주차문제로 불편을 끼쳐서 너무 죄송하다는 말도 전했다.

이렇듯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지닌 이씨가 만드는 음식이 어찌 맛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가끔 네 사람이 들어와서 정식은 삼인분만 시키고 황태구이 하나를 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절대 안 된다고 냉정하게 말한다는 이씨.

정성으로 만드는 음식을 싸구려로 생각하는 것이 싫어서 돈 받는 것도 꺼려진다는 이씨는 자신이 만든 음식에 자존심을 건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존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것 저 것 다 귀찮고 어디 정갈한 한정식 집 없나..싶을 때 ‘구현품’을 떠올리면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농협하나로 매장에서 정발산 방향으로 틀어 큰 사거리에서 200미터 정도 직진하면 24시 편의점 미니스탑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들어가면 한자로 입구 자 여섯 개가 들어 있는 간판이 금방 보일 것이다.

일행이 여럿일 때는 미리 예약을 해야만 자리를 잡을 수가 있다. 예약 전화는 (031)922-5335

비록 미역국을 먹지 못 한 생일이었지만 그래도 구수한 된장찌개에 나물 몇 가지. 그리고 생선까지 올려진 근사한 한정식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행복한 생일상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주인과 얘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는 괜히 휘파람까지 휙 휙 불어졌다.

우은실 기자/silver@f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