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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유통업체 ‘횡포’ 납품업체 불만 드높아

반강제적 원가인하, 일방적 지원금 요구등
납품업체 피해 결국 소비자측에 고스란히
공정위, 불공정거래 무기명 설문 조사


대형 유통업체들의 경쟁적 가격인하로 인해 납품업체들의 허리가 휠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98년 이마트, 킴스클럽, 롯데마트 등 국내 할인점에 까르푸와 홈플러스, 월마트 등 외국계 할인점이 국내에 발을 디디면서 가격인하 경쟁은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전면전 양상을 띠게 된 것은 지난해 경기불황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소비심리위축으로 목표매출 도달이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상권내 유통매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마트는 자사상품의 구매에 상관없이 비싼 상품을 발견해 신고만 해도 일정액을 돌려준다는 ‘최저가격 신고보상제’를 들고 나왔다. 이에 다른 유통업체들이 잇따라 가격할인 정책을 내놓기 시작, 최고 40%대까지 가격을 내리기도 했다.

문제는 유통업체들의 이 같은 가격전쟁에 납품업체들이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납품업체들의 희생은 곧 소비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기 마련.

납품업체 관계자는 “유통업체들이 원가를 낮추면 고스란히 소비자가격에서 그 손해액수를 뽑을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 원가인상을 둘러싸고 풀무원이 까르푸에 납품을 중단하는 일이 발생했다. 까르푸는 풀무원 제품을 팔지 않는다는 안내문을 매장에 부착하는 등 사태가 극에 달하기도 했다.

풀무원 관계는 “같은 제품을 할인점마다 다른 가격으로 제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원가인하에 대한 까르푸측의 일방적인 요구를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현재 까르푸와 풀무원측은 일단 감정적인 문제를 접고 협의 중에 있다.

유통업체의 반강제적인 원가인하 요구는 중소유통업체에게는 더 심각한 사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판매가 원활하면 모를까 재고가 발생하면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어 회사가 흔들리는 지경에도 이른다는 설명이다.

한 중소납품업체 관계자는 “할인점 한곳에서 가격을 내리면 따라 같이 내리거나 물건을 빼야 하는 상황이 발생되어 여러 가지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고 밝혔다.

업계 전문가들은 대형유통업체 한 곳에서 특정상품의 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춰 판매할 때 해당상품을 유통하는 납품업체에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쳐 시장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유통업체들의 횡포에 일찌감치 수를 쓰기도 한다. 유통업체별로 중량이나 포장 등을 달리해 납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참치의 경우 까르푸에는 100g짜리 캔을, 이마트에는 120g짜리 캔을 각각 다른 가격에 납품해 비교적 원가 인하 요구를 조금이나마 피하겠다는 것이다.

생산비 등의 비용이 더 소요되기는 하지만 유통업체들의 등살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낫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권을 쥐고 있는 유통업체들의 횡포는 이밖에도 한 두 가지가 지적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유통업체와 납품업체간의 충돌 중에 가장 깊은 골은 업체간 극심한 가매출 행위다. 유통업체들은 상반기와 하반기에 납품업체들의 실적평가를 하는데 여기서 백화점이 요구하는 수준의 매출을 달성하지 못하면 나쁜자리로 쫓겨나게 된다. 그래서 납품업체들은 가매출 즉 거짓 매출을 기록하게 된다. 납품업체들은 가매출에 따른 매출액이라고 대형할인매장의 경우 보통 15%, 백화점에 속한 매장의 경우 보통 30%의 수수료를 내게 된다.

높은 수수료를 내야하면서도 백화점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이유는 매장 위치가 달라지면 더 많은 비용이 들고, 쫓겨나면 영업력에 더 큰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한 납품업체 관계자는 판촉사원비용과 아르바이트 비용, 재고조사 비용, 집기구입비, 창고표 등을 납품업체에만 모두 전가하고 있는 문제를 지적했다.

행사지원금과 선물세트 및 개점지원금 등 갖가지 명분을 내세운 각종 비용이나 협찬금에 대한 요구도 일방적이며 반강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유통업체측은 “계약을 통한 합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만 일축했다.

얼마전에는 유통업체들의 횡포에 못 이긴 납품업체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유통업체들은 윤리경영 등을 내세워 부당거래를 모두 없애겠다고 선포하기도 했으나, 없어지기는커녕 더욱 횡횡하고 있다는 게 납품업계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14일 유통업체와 납품업체간의 불공정거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무기명 설문조사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납품 및 입점업체간의 정확한 거래실태를 파악하고 문제를 바르게 환원하겠다는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유통업체의 불공정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이 같은 당국의 감시체제가 상시화되어야 한다며 이번 공정위의 움직임을 반겼다.

한 납품업체 관계자는 “소비자들은 원하는 제품이 매장에 없으면 다른 업체의 매장으로 발길을 돌리기 때문에 유통업체들의 ‘하려면 하고 말라면 말아라’는 식의 태도는 곧 고객을 놓치는 행위”라며 “따라서 유통업체와 납품업체는 동등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대형 할인유통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판매사원 김선미(24)씨는 “유통업체측은 납품업체를 두고 ‘협력업체’라고 부르고 있으나 실제로는 ‘협력’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라며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이미 관례가 되어 납품업체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이 산재하다”고 밝혔다.

구인영 기자/her@fe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