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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를 뒤흔든 수상한 맛, 고상한 맛, 황홀한 맛

음식의 통치술과 맛이 이끈 위대한 교류

웬만해서는 ‘맛’에 회가 동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렇다. 그 맛 이야기다. 이 책에는 말만 들어도 동물적 설렘과 즉각적인 두근거림을 일으키는 맛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 스물 세 편이 담겨 있다.

 

무수한 음식은 유구한 변천을 거쳐 식탁 위에 올라오고 우리 혀는 배우고 길든 대로 맛을 본다. 음식에는 파란의 인간사만큼이나 흥미로운 역사가 깃들어 있다. 그 음식의 역사에서 소홀히 다뤄도 좋을 시대란 없다. 그런데도 특별히 18세기를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고급스런 음식이 대중화되고, 이국적 음식이 세계화되는 변화가 크게 일어난 시대가 바로 18세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18세기는 저급한 감각으로 치부되어온 맛에 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문화의 전면에 등장한 시대다. 금욕과 절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욕망을 추구하고 소비를 과시하는 취향의 대중화가 시작된 시대가 바로 18세기다. 거대한 변화와 전환의 격동기였기에, 그 시대의 미각을 말하다보면 맛과 맞물린 시대의 변화상이 자연스럽게 이끌려나오게 된다.

 

그리하여 음식의 맛은 혀끝의 감각에만 한정되지 않고 문화와 교류, 경제와 사회의 복잡한 세계사를 인드라의 그물망처럼 얼기설기 엮어주는 그물코가 된다. 인문학자의 시각으로 동서양의 맛과 그 맛에 얽힌 흥미로운 현상을 살펴보려는 동기가 여기에 있다.


18세기에 펼쳐진 지극한 맛의 향연

18세기의 ‘맛’을 중심으로 세계사의 흥미로운 단면을 맛깔나게 서술한 책이 나왔다. 안대회, 이용철, 정병설, 정민, 주경철, 주영하, 소래섭 등 ‘한국18세기학회’에서 활동하는 내로라하는 인문학자 스물세 명이 쓴 글을 엮어 만든 책이다.

 

한국18세기학회는 한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18세기를 다채롭고 참신한 시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으로, 이 책은 학회가 일반 독자들과의 소통을 목표로 기획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책에 실린 글은 2012년 9월부터 2013년 7월까지 격주간으로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됐으며, 2012년과 2013년 봄·가을, 같은 내용으로 개최된 학술발표대회는 대중적으로도 큰 관심을 모으며 이례적인 주목을 받았다.


왜 ‘맛’인가? 왜 하필 ‘18세기’인가?

오감 중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직접적인 감각을 들라면 미각을 들어야 할 것이다. 누구나 먹어야 산다. 생존과 직결된 감각인 만큼, ‘인간의 먹이’ 없이 인간을 말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왜 하필 18세기인가? 18세기는 근대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문화가 풍성하게 피어나기 시작하던 시기다. 한마디로 먹고살기 위해 먹던 ‘먹을거리’ 차원의 음식이 비로소 ‘맛’의 차원으로 변화하던 때가 18세기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생존의 차원을 넘어선 문화로의 보편적 이행으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18세기 이전에도 맛을 탐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전에는 미식을 즐기던 계층이 일부 부유층과 권력가들에 한정돼 있었던 반면, 18세기부터는 ‘그들’의 취향이 대중의 취향으로 널리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는 가히 식탁 위의 혁명으로 부를 만했다. 누구나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곧 누구나 문화를 누릴 수 있게 됐음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다.


맛에 목숨을 걸다

어떤 맛에는 목숨을 걸어야 했고, 어떤 맛은 죄의 사함을 받아야 했으며, 또 어떤 맛은 국가의 통치 도구로도 활용됐다. 한때는 버터를 사용하는 데도 교황청의 면죄부가 필요했다.

 

이전에는 유럽 요리에 올리브기름이 많이 쓰였지만, 어느새 사람들은 버터의 부드러운 맛에 중독되어갔고, 금식기간 중에 버터를 사용하려면 교황청의 특별한 허가가 필요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옷 입는 방식에 대해 관여하시지 않는다”는 루터의 주장을 들어보라.

 

버터를 먹을 권리에 대한 논쟁이 종교개혁 당시의 논란거리로 번져간 상황이 눈앞에 그려진다.

 

논란의 도마에 오른 먹을거리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이 홍차에 타 마셨을 뿐 아니라 호화로운 설탕장식으로까지 만들며 부를 과시하던 설탕의 달콤한 맛은 사탕수수농장에서 착취당하던 노예들의 죽음을 대가로 즐긴 맛이었다.

 

한편, 조선의 사대부들은 “선비가 절개를 지켜 죽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복어를 먹고 죽는 게 녹록하게 사는 것보다 낫지 않겠나?”라고 장담하며 자진해서 목숨을 걸고 복어국을 먹기도 했으며 춘궁기를 힘겹게 넘기는 배고픈 백성들은 문자 그대로 ‘똥구멍이 찢어지는’ 변비의 고통을 각오하고 솔잎으로 만든 구황식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도 했다.

 

진(gin)과 맥주, 두 가지 술의 흥망사에서는 먹을거리를 규제하거나 권장하면서 국민을 들었다 놨다 하던 국가의 통치술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초, 영국 빈민가를 휩쓴 진 광풍은 가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조금만 마셔도 쉽게 취하는 저렴한 진이 유행처럼 번져나갔고, 영양 상태도 좋지 않던 몸에 이처럼 독한 술을 감당해낼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생산력을 잃어가자 국가는 극단적인 주세법과 여러 가지 정책을 동원해 진을 규제했다.

 

그러나 관리 가능한 취기를 적당히 제공하며, 비위생적인 물의 대체제로 훌륭하게 쓸 수 있던 맥주는 진과 달리 오히려 국가가 권장한 음료였다. 맥주는 곧 대영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신의 축복과도 같은 음료였다.


누구나 맛을 누릴 권리가 있다

또한 18세기는 교류의 시대이기도 했다. 조선에 들어온 고추는 고추장의 형태로 제왕의 식탁에 올랐다. 성미가 깐깐하여 자주 입맛을 잃곤 했던 영조는 조종부 집에서 담근 고추장을 유달리 좋아해 조종부는 미워해도 그 집 고추장만은 도저히 미워하지 못했다.

 

1760년 남해안 바닷가에 도착한 중국 표류선에 실려 있던 차(茶)는 차에 대한 조선인의 미각을 일깨워주었으며 쇠고기를 대놓고 먹는 것을 금기시하던 일본에서는 ‘쇠고기 환약’이라는 이름으로 은밀한 육식이 이뤄졌다. 그 당시 쇠고기 환약을 만들던 일본의 명가에서는 자신들이 그 유명한 조선의 우육환(牛肉丸) 제법을 정통으로 이어받았노라 선전했다.

 

상류층의 호사로 여겨지던 기호품은 급속도로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홍차가 그랬다. 중국에서 들여와 귀족들이 각종 다구를 갖춰놓고 자랑하듯 즐기던 홍차는 음용하는 자의 지위를 확인시켜주는 소품과도 같았다. 귀족을 묘사한 그림에 홍차는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이후 무역 증대로 홍차를 마시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여성이 모여 자주 함께 홍차를 마시던 풍속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성도 다수 등장했다.

 

그러나 어쨌든 홍차를 마시는 일은 곧 ‘매너 있고 교양 있는’ 시민의 수평적 교류와 사교를 뜻하게 됐고, 홍차는 모두에게 열려 있는 시민성을 상징했다.


먹고 마시고 토론하고 생각하라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곳에서는 언제나 말하고 즐기며 생각을 나누는 행위도 뒤따랐다. 커피란 무엇인가? 일명 ‘천천히 퍼지는 독약’으로 불린 이 검은 음료는 프랑스 대혁명을 일깨운 기폭제였다.

 

와인이란 또 무엇인가? ‘황홀한 묘약’과도 같은 와인은 때로는 애교 수준의 주정을 낳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서게 하며 예술혼을 일깨우는 영혼의 물방울이었다.

 

18세기의 식탁 위에서 유럽인들은 맛의 즐거움을 공유하며 미식 클럽을 만들기도 했고 맛을 탐하는 각계 인사들은 식탁 위에서 모두 평등했다.

 

1780년 창립된 ‘수요회’의 미식가 회원들은 매주 수요일 오후 네시가 되면 레스토랑 르 가크에 모이곤 했다. 회원들은 식탁에서만큼은 속세의 사회적 지위나 직업과 관계없이 모두 대등한 관계에서 식사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서로 별명을 붙여 불렀다.

 

법률가, 교수, 극작가 등 당대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칠면조 선생’ ‘오마르 새우 선생’ ‘찰광어 선생’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한편, 연회를 열고 공공지식을 나누던 ‘루나 협회’의 식탁에는 도자기 제조업자 조사이어 웨지우드, 산소를 발견한 조지프 프리스틀리, 증기기관 발명가 제임스 와트 등이 모두 모였는데, 이들이 왕립협회나 유명 대학의 상류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 일반인이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바로 이들이 전기나 식물학 같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관심을 갖고 차세대 과학기술을 고안하여 산업에 응용하는 데 정열을 기울인 주역이었다. 이 같은 식탁 위의 교류 속에서, 은밀하고도 위대한 18세기 문화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