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 문헌으로만 전해지며 맥이 끊긴 전통주를 복원함과 동시에 교육에 겁 없이 뛰어든 남자가 있다. 지금은 많은 제자들과 함께 전국 13개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 전통주의 기반을 닦아온 박록담 전통주 연구소장이 그 주인공. 푸드투데이가 박록담 소장을 만나 전통주의 향만큼이나 깊이가 있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독특한 ‘특기주’를 빚는 애주가(愛酒家)
처음 시작하는 일이 늘 그렇듯 박록담 소장도 초반에는 쌀 수십 가마니를 버리는 일은 부지기수였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박 소장은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꿈을 버리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이것은 반드시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시도 끝에 문헌 속 우리 전통주를 복원한 결과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양조학이 발달한 나라였다는 깨달음도 얻었고요. 우리나라는 이미 조선시대 때부터 술을 빚는 기술이 과학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전통주를 복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양조 기술을 체계화하고 재현하는 과정을 거쳐 우리 술을 교육을 통해 대중화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죠.“
사회 환원과 기여, 대중화 방식으로 박록담 소장이 택한 것이 바로 전통주 교육이다.
전통주연구소의 전통주 교실은 가양주반, 전통주 연구반, 특기주반, 전문가반 등으로 배우는 내용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리돼 있다.
가양주반은 '전통그대로 집에서 담궈 마시는 술’로 가정에서 빚어 가족과 친구와 함께 나눠 마실 수 있는 술 빚는 방법을 배운다.
전통주 연구반은 가양주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양조 기술의 축적과 전수 과정을 배운다.
전문가반에서는 전통주 및 가양주의 보급, 대중화를 위한 인력 양성을 비롯해 양조기술의 체계적 기록과 축적에 따른 전문가 육성 프로그램으로 이론과 실기의 폭넓고 심층적인 교육이 이뤄진다.
전문가반을 거쳐 전통주 전문인으로 양성된 제자들은 서울 녹번동에 위치한 연구소 외 전국 12개 연구소에서 박록담 소장과 함께 전통주 복원과 더불어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특기주반은 우리나라 술 빚기 형태의 다양성과 관련한 비법을 가르친다. 교육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맛과 향을 가진 특기주들이 탄생된다.
기자가 가장 흥미롭게 느낀 것은 바로 이 특기주 반이다. 만드는 사람마다 다른 향과 맛을 가진 술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술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 와인이나 맥주에 비해 그 종류가 다소 적게 느껴지는 전통주 시장에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요즘 젊은 층을 중심으로 주스를 섞은 막걸리, 막걸리를 베이스로 한 칵테일 등이 유행하고 있는데 그것과 같은 이치일까?
이에 대해 박 소장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술이 맛있고 향이 좋다면 일부러 섞어 마실 필요가 없어요. 와인을 칵테일로 만들어 마시지 않고, 그 자체의 향을 즐기듯 우리 전통주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그자체의 향과 맛을 가진 ‘특기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수성’보다 힘이 센 ‘차별성’
외국의 와이너리가 천 개 있다고 치면 그 천 개의 와이너리가 모두 다 성황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잘 되는 곳은 유명 브랜드 양조장인데 그 양조장들이 꼭 화려한 외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들은 양조장의 겉모습이 아닌 허름하고 작더라도 전통 와인을 생산하는 곳을 찾아 다닌다.
이를 두고 박 소장은 “소비자들은 어떤 와인이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양조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몇 년 동안 한식세계화의 일환으로 막걸리 세계화도 함께 진행됐지만 아쉽게도 800개의 양조장이 만드는 방식이 모두 똑같아요. 발효제나 술 빚는 방법 등이 모두 일본식으로 차별성과 전통성을 논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현상은 일제 강점기의 잔재로 일제 강압에 의한 것이었지만 해방 이후 이 방식을 계속 지속해왔다는 건 우리가 반성해야 할 문제죠. 좋은 원료로, 우리 방식으로 제대로 만들어 향기 있는 술, 진짜 전통주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정부가 주도적으로 양조장들이 생산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유도하고 지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박록담 소장이 전통주의 세계화보다 먼저 바라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 전통주가 실생활에서 찾는 술이 되는 것이다.
현재 국내 전통주 소비량은 8% 정도밖에 미치지 못한다. '내집에서 마시는 술'을 하찮은 술로 마련하지 않듯, 술집에서 마시는 술이 아닌 생활 술이 된다면 내수시장은 튼튼해지고, 튼튼한 내수시장은 전통주의 다양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리 전통주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막걸리가 무엇인지, 전통주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막걸리가 어떤 술인지 물었을 때 우리가 대답하지 못한다면 세계인을 이해시킬 수 없어요.”
그는 “와인과 맥주 등의 주류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시장에서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하면 반감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차별성으로 다가가 우수성을 인정받는 것이 순서”라고 말한다.
박록담 소장이 말하는 우리 전통주의 ‘차별성’은 바로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술, 문화로 이야기 하자
“13년 전 연구소를 세우면서 지금까지 양조운동을 펼쳐 지금의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이제는 음주문화를 이야기할 때죠.”
박록담 소장이 말하는 우리 전통주의 문화 중 가장 핵식점인 것은 '가향주' 문화다. 말 그대로 술에 꽃을 그려넣는 문화를 뜻한다.
우리는 국화주, 장미주, 맨드라미주, 매화주, 창포, 솔잎 등 천연 허브를 술에 넣어 꽃 술을 즐겼던 민족이다. 계절에 따라 다른 자연을 담아 술을 빚는 아름다움으로 자연스럽고 다양했던 전통주가 지금은 저가 원료를 사용한 획일적인 술로 치부되며 그나마 상품화되고 대중화 된 전통주는 100여 종이 안된다.
그는 “가장 한국적인 문화, 이 아름다운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가 평생을 먹는 '주식'인 쌀로 술을 만든다는 점, 예부터 술을 약으로 생각해 적당한 양의 술을 손님에게 대접하고, 부모님에게 약으로 드렸던 '약주 문화'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우리의 술처럼 와인도 맥주도 모두 끼니를 먹으며 반주로 시작된 문화다.
그 세계 공통의 문화 속에서 '약주 문화'는 충분히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실 때 향을 먼저 맡는다. 박 소장의 바람처럼 우리 전통주도 자국민과 세계인들에게 향을 음미하고, 풍미를 느끼는 술이 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