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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드라마로 보는 식생활의 변화] (6)전원일기-맥주

[푸드투데이 = 조성윤기자]  <편집자 주> 각박한 일상에 지쳐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90년대 드라마가 여러 채널에서 부활하고 있다. 그 중 '전원일기'는 매니아층이 생길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방송된 전원일기는 농촌사회의 이면과 가족애를 섬세하게 그린 작품으로 각광받았다. '양촌리'라는 동네에서 손꼽히는 대가족으로 꼽히는 김회장의 가족을 주축으로 이웃 간의 일상을 이야기 하는 이 드라마는 유독 '음식'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다. 23년이라는 세월을 담은 이 드라마를 보면 우리의 식생활도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있다.

 

 

Episode

정지용의 유명한 시 '향수'에서 그는 시골아낙이었던 자신의 부인을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라고 표현했다. 종기아빠도 자신의 부인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읍내에 새로 생긴 다방의 마담은 달랐다. 논밭에서 일하는 여자들과 달리 화장과 옷차림이 화려했고 무엇보다 친절하고 애교가 있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종기아빠는 자신을 친오빠가 같다며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마담에게 호감을 느끼고 식사자리를 마련했다. 뭔가 "있어" 보이고 싶었던 종기아빠는 돼지갈비와 맥주 두 병을 한꺼번에 시켰다.

 

 

마담은 소주보다 비싼 술인 맥주를 두 병이나 시켰다는 사실에 흐뭇해하고 종기아빠는 계산대에서 생각보다 금액이 많이 나오자 허리가 아픈 아내의 약값보다 비싸다는 사실에 언짢았다.

 

 

업친 데 덥친 격으로 음식점에서 나오는 길에 동네 청년인 일용이와 마주치게 된다. 종기아빠는 일용에게 못 본 일로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의 바램과 다르게 종기엄마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화가 난 종기엄마는 다방에 찾아와 종기아빠에게 화를 내고 마담에게 따지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에 수선스럽게 행동한다는 마담의 태도에 무안해진다.

 

 

1910년대부터 일본에서 건너온 맥주는 지금과는 다르게 상류층들만 먹을 수 있었다. 1933년 오비맥주와 오늘날의 하이트진로인 조선맥주가 생겼다. 일제 강점기였던만큼 오비맥주는 쇼와기린맥주, 하이트진로는 대일본맥주(현 아사히맥주)가 모기업이다.

 

당시 한국 맥주는 맥주라는 표현보다는 주로 '삐루(ビール)'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었다. '삐루'는 일본이 한국에서 철수하고 1948년, 소화기린 맥주는 OB맥주의 전신인 동양 맥주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맥주'라는 이름을 찾게됐다. 오비맥주는 6.25전쟁을 거쳐 1952년 5월 22일 정식 민간기업으로 출범하게 된다.

 

 

조선 맥주는 크라운 맥주(현 하이트맥주)로 상호가 바뀌게 된다. 오비맥주와 하이트의 경쟁은 이때부터 시작이 된다. 1950년대까지 크라운 맥주는 OB맥주보다 점유율이 높았다. 승리의 달콤함을 맛 본 크라운맥주는 대리점 확장이라는 무리수를 둔다. 지나친 욕심을 화를 부르는 법. 무리한 대리점 확장에 크라운 맥주는 부도가 나고 1960년대에는 한일은행의 관리 대상이 되는 굴육을 겪게된다.

 

결국 부산의 대선 발효(현 대선주조)가 인수를 하게 된다. 인수 후 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했다. OB와 크라운은 각각 60%, 40%를 차지하며 양강 구도로 흘러갔다. OB맥주는 60년대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생맥주를 선보인다. 또 홉을 재배하며 맥주의 대중화에 박차를 가하며 유통채널을 확보해나갔다. 1965년에는 처음으로 '맥주 판매 100만 상자'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1960년대 가장 인기있는 추석 선물은 맥주였고 맥주의 광고는 콘셉트는 승마와 조정 등 고급 스포츠의 이미지를 덧붙여 상류층의 술이라는 공식을 구축해 나갔다.

 

 

맥주는 소주가 갖는 노동주로서 기능과 이미지와는 달리, 서민들에게는 매우 먼 술이었다. 1970년대까지 맥주는 막걸리나 소주에 비해 훨씬 비쌌고, 국내 술 소비량은 막걸리와 소주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 맥주의 소비량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 OB맥주가 생맥주를 생산하면서 'OB베어스'라는 브랜드로 생맥주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면서 유래없는 호황을 누렸다. 특히 생맥주는 청바지와 함께 젊음을 상징하는 표상이 됐다.

 

이 시기 맥주회사들은 맥주의 소비를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생맥주 체인을 운영했다. 1980년 OB맥주가 OB베어라는 호프집을 체인모집해 흥행에 성공하자 경쟁사였던 크라운맥주에서도 크라운비어를 운영했다.


대학가와 직장인들 사이에서 가볍게 술을 마실땐 소주 한 병 대신 맥주 500ml로, 수 많은 막걸리집들은 호프집으로 바뀌었다. 맥주의 소비는 80년대 꾸준히 상승했고 1988년 서울올림픽은 맥주가 확대되는 중요한 계기가된다. OB맥주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의 공식맥주로 지정되면서 황금기를 맞이 했다. 1988년 맥주의 출고량은 102만3000㎘에 달했다. 50년 동안 49.9배가 증가하며 국민들이 가장 애호하는 주류로 등극한 것이다.

 

그렇지만 맥주는 서민적인 이미지에서 소주나 막걸리를 이길 순 없었다. 생활수준이 높아진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며 중산층을 중심으로 와인과 위스키가 중산층을 중심으로 새롭게 부상했다.

 

특히, 2012년 영국 이코노미시트지의 기자가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이 없는 한국 맥주"라는 표현한 도발적인 기사에 많은 한국인들이 충격을 받고 수입맥주를 찾게된다. 편의점을 중심으로 '수입맥주 4캔에 만원'행사를 하면서 수입맥주는 한때 맥주시장에서 70%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하게 되고 '라거'만이 맥주의 전부임을 알았던 소비자들도 에일과 IPA 등 다양한 맥주가 있음을 알게된다.

 

한국은 주세법상 몰트 함량이 10% 이상이면 맥주로 분류하기 때문에 외국맥주에 비해 밍밍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음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맛'보다 이미지와 마케팅에 의해 색이 입혀질 때가 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여러 종류 맥주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내가 생각하는 제일 맛있는 맥주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온 후의 맥주 한모금, 요즘처럼 여름이 오기 직전 야외좌석에서 좋은 사람들과 마시는 그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