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보검스님의 사찰음식-⑨> 다선일미, 차와 수행

중국 조주 선사, “차나 한잔 마시게”, 대흥사 초의선사 《동다송》 저술
“체(體)와 신(神)이 조화를 이루어 건(健)과 영(靈)이 서로 화합 영합해야
선과 차(茶)가 하나로 원융화해, 선법(禪法)과 다도(茶道)가 한 맛이 득도경지“

사찰음식은 먹는 것만이 아니다. 마시는 음료도 사찰음식에 포함된다. 음식은 마시고 먹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은 커피가 대세이지만, 사찰에서는 지금도 차를 마신다. 불교를 창시한 부처님은 특별히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물을 주로 마셨던 것 같다. 사실, 인도에서도 차의 역사는 뚜렷하지 않지만 대체로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차의 역사를 중국 후한시대의 의성(醫聖)인 화타(華佗,145년~208년)에게서 찾고 있다. 전설상으로는 중국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인 신농씨(神農氏)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황제와 더불어 중국인의 시조로 받들어지는데, 그는 의약(醫藥), 쟁기와 보습, 도기(陶器), 활을 발명했고, 처음으로 시장을 열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140년간 재위했으며, 백성을 위해 수많은 약초를 맛보았는데 맹독 성분을 가진 단장초를 맛보다 중독, 화를 입어 다릉(茶陵)에 장사지냈다 한다.
 

역사적 근거가 확실한 인물은 당나라 때의 육우(陸羽, 733년~ 804년)인데, 그는 문인 출신이다. 차를 만들고 마시는 것에 관한 지식을 정리한 《다경》(茶經) 3권 등을 저술하였으며, 중국의 차 문화에 크게 기여했다. 

 


한국에서는 신라 때, 최치원(崔致遠, 857년~908년)이 수입해 왔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해부(海夫)이며, 시호는 문창(文昌)이다. 868년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후 당나라의 관료로 생활하였다. 부산 해운대는 그의 호를 따서 생긴 이름이다. 
 

지리산 하동에서부터 차 재배가 시작되었고, 차츰 확대되어 지금은 몇몇 곳에서 생산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차는 사찰에서도 재배하게 되었고,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차는 인기 품목이었다. 밥을 먹고 나면 반드시 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의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 남도지역의 몇몇 사찰에서는 차를 재배하여 생산했는데, 하동 쌍계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등이 차를 직접 재배하여 전국 사찰에 선물로 보내서 알려졌으며, 차 문화가 사찰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중국불교에서는 조주 선사와 관련된 차 이야기가 많다. 조주종심(趙州從諗, 778년~897년) 선사는 당나라 말기의 선승이다. 중국선문에서는 두 권의 유명한 선어록(禪語錄)이 있는데, 그것은 《벽암록(碧巖錄)》과 《무문관(無門關)》이다. 조주선사와 관련된 공안 이야기는 《벽암록》에 12번, 《무문관》에 다섯 번이 나올 정도로 비중 있는 선사다. 선종에서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참구할 때, 유명한 무(無) 자(字) 화두는 조주선사에서 비롯된 공안이다. 또 조주선사는 끽다거(喫茶去)로도 유명한데, 누구에게나 “차 한 잔 마셔!”라고 했다. 무엇을 물어보던지 “차나 한 잔 하게나!”가 답이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절의 원주(살림살이 하는 스님)스님 왈, “큰 스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무엇을 물어 보던지 ”차나 한 잔 하라!“고 하시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시가요?“라고 했다. 그러자  조주 선사는 원주에게 큰 소리로 ”원주“ 하고 불렀다. 그러자 원주가 ”예“하고 대답하자, ”자네도 차나 한잔 하게!“라고 하자, 이 때 원주는 불현 듯 도를 깨쳤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도 닦는 일이란 별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평소의 생활이 그대로가 다 도 닦는 일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조주선사는 차를 빼놓고는 별로 할 말이 없는 선승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고려 때부터 절에서 스님들이 차를 마셨지만, 《동다송(東茶頌)》이란 차에 관한 책을 저술한 초의선사가 단연 돋보인다. 
 

초의 의순(草衣 意恂:1786년~1866년)은 조선 후기의 승려로 해남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에 주석했던 고승이다. 다산 정약용에게서 유학과 시문(詩文)을 배웠고, 추사 김정희(金正喜) 등과 사귀면서 유생들과도 교유했다.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화엄경》을 새길 때 증사(證師)가 되었다. 
 

초의 선사는 《동다송》에서 토산 차에 대해 색깔·향기·맛 등이 뛰어나 중국차에 뒤지지 않는다고 찬양하였다. 또,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의 차밭은 차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적지라고 하였다. 법도에 맞게 만들어지지 못한 차에 대해서는 “천하에 좋은 차를 속된 솜씨로 망치는 것이 많다.”고 안타까워하였다.
 

차를 따는 시기로 육우의 《다경(茶經)》에서 말한 곡우(穀雨) 전후의 시기는 토산 차에 적합하지 못하고, 입하 뒤가 적당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의 경험에 의한 주장이다. 그리고 “차를 딸 때 그 묘를 다하고, 차를 만들 때 정성을 다하고, 참으로 좋은 물을 얻어서, 중정(中正)을 잃지 않게 차를 달여야 체(體)와 신(神)이 더불어 조화를 이루고, 건(健)과 영(靈)이 서로 화합하면 차도(茶道)가 이루어진다.”고 강조하였다.
 

체란 물을 지칭하고 신이란 차를 가리키므로 차는 물의 정신이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좋은 물이 아니면 차의 정신을 나타낼 수 없고, 참으로 좋은 차가 아니면 체가 되는 물에서 좋은 차 맛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건과 영은 차의 신이 건실함과 물이 신령스러움을 의미한다. 마지막 송에서는 다인(茶人)의 심회와 자부를 담은 시를 수록하였다.
 

대개 차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선방에서 참선하는 선승들이 차를 즐겨 마셨다. 졸음도 그치게 하고 잡념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항상 정신이 오롯해지기 때문에 차를 마셨고, 차는 즉 선승들에게는 필수적인 음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