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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유정임 풍미식품 대표

대이은 ‘종갓집 손맛’으로 유명세

한국인들에게 김치를 먹는다는 말은 곧 추억을 먹는다는 말이 된다.

눈 쌓인 짚을 걷어내고 땅 속 깊이 묻어 두었던 항아리 뚜껑을 열어 꺼내 먹던 묵은지, 살얼음이 동동 뜬 칼칼한 동치미.

한국인이라면 생각만 해도 혀끝이 짜릿해지고 가슴이 얼얼할 만큼 맛 있는 별미가 바로 발효 과학의 대명사 김치다.

김치의 역사는 오래됐다. 절이고 발효시켜 만든 먹을거리 이야기는 삼국시대에 이미 나온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고구려인이 장, 젓갈 만들기를 잘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도 젓갈 김치류인 ‘어해’ ‘저해’라는 먹을거리가 나온다.

이처럼 천 년을 넘게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김치는 이제 단순한 식품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 아이콘이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수모를 겪기도, 대접받기도 한다. 수모를 가장 많이 받은 때는 해방 이후다. 김치 냄새라면 코를 틀어막던 미국인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스스로도 “김치는 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김치 세계화’를 부르짖으니 이런 상전벽해도 드물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나라경제가 부강해지니 문화 아이콘에 힘이 실린 덕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김치는 내 운명’ 삼아 김치에 혼을 불어넣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치 명인 유정임 풍미식품 대표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배추 산지 예약 구매로 일관된 품질 유지
칼슘·파프리카 김치 등 특허 제품만 11종

그녀만의 ‘특별한 맛’이 있다


종갓집에 가 보면 뭔가 특별한 음식이 있다. 일반 가정집에서 좀체 보기 힘든, 아니 처음 듣는 메뉴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재료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누구나 먹는 재료들이다.

만드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유정임 명인이 손수 담그고 있는 김치에서도 다른 김치와는 다른 ‘특별한 맛’이 있다.

유 명인의 손끝에도 친정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김치 맛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갓집’의 손맛이 배어있는 것이다.

종갓집 맏며느리에서 또 유난히 손길이 많이 가는 유치원생 아이들의 엄마로 빡빡한 하루를 보내던 유 명인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온 것은 그녀가 30대 초반이던 84년이었다.

그리고 그 제안대로 유 명인은 수원에 있는 세류시장통 안에 열 평 남짓한 김치가게를 열었다.

곧바로 어머니로부터 전수 받은 김치맛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소문은 수원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갔다.

비법은 질좋은 재료의 선택

유 명인은 재료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재료선택은 철저하게 산지구매를 통했다.

배추 값이 금값으로 치솟을 때도 가격 변동 없이 예전과 그대로 거래처에 납품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산지예약구매를 통해 가능한 일이었다.

또 유 명인은 배추뿐만 아니라 김치에 들어가는 양념도 양질의 국내산 원료와 천연 양념을 사용하는 것을 신앙처럼 지켰다.

여기에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저림과 숙성의 원칙이 더해져 ‘유정임’만의 김치맛이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다가 아니다. 유 명인이 ‘그녀만의 김치맛’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김치에 대한 그녀만의 끊임없는 공부였다. 그녀는 수백 가지가 넘는 우리 김치의 도드라진 점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기 위해 연구소까지 설립해 ‘숨은 맛’을 찾아냈다.

그 결과 그녀는 마침내 올 초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지정하는 식품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명실상부한 ‘김치 명인’이 된 것이다.

전통식품 연구에도 일가견

유 명인에게서 또 한 가지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김치맛’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만 맞춰져 있지 않고 ‘세계의 입맛’에도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머지않아 김치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세계적인 식품이 될 것으로 확신 하고 있는 유 명인은 이미 김치연구소를 통해 난관(달걀 껍질)을 재료로 한 칼슘김치 제조법과 딸기 고추장, 외국인용 파프리카 김치 등을 개발해 총 11건의 특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김치’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 명인에게는 우리의 전통음식이면 뭐든지 연구대상이다. 고추장, 된장, 한과 등 우리의 전통음식이면 뭐든지.
그녀의 ‘전통음식 사랑’은 지나칠 정도다. 회사 3층에 있는 전통식품문화관에는 우리식품의 우수성과 역사까지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곳에는 고유 식품인 김치, 장류, 떡류, 한과류, 두부, 엿 등 전통 식품에 대한 정보와 재료, 실제 크기의 모형들이 갖춰져 있어 마치 박물관을 보는 듯하다.

지금 이곳은 국내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우리 전통식품에 대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좋은 장소로 제공되고 있다.

유 명인은 문화관 말고도 다른 공간에 우리 민족의 생활사를 알 수 있는 민속자료들을 많이 수집해 보관하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생활사박물관도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그의 꿈이다.

이웃과 나누는 선행도 ‘큰손’

그녀는 또 수원에서는 ‘큰 손’으로 통한다.

바로 푸드뱅크에 김치를 수년간 기부해온 숨은 ‘큰 손’인 것이다. 유 대표는 별일 아닌 것을 남들에게 알리는 것조차 부끄럽다며 이 일 만은 하기를 극구 사양한다.

하지만 주위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큰 손’이 된 내막(?)도 알게 됐다. 유 명인은 김치회사를 설립하기 전 맛있는 김치를 담그는 비법을 찾으려고 같은 김치만 수십 번 담궜다.

그 때문에 김치가 많아졌고 모두 먹을 수가 없어 가까운 이웃과 나눠 먹었지만 그래도 남았다.

유 명인은 그때서야 “그래서 복지시설에 나눠 줬는데, 그것이 습관이 되어 회사를 차린 지금도 김치를 복지시설에 기부하고 있다”며 얼굴을 붉힌다.

이런 그녀에게 또 한 가지 좋은 일이 생겼다. 올해로 열네 번째를 맞은 여성경제인의 날에서 ‘산업훈장’ 을 받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그녀가 ‘김치명인’이 아닌 ‘여성기업인’으로 빛이 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관심은 금방 ‘김치’로 옮겨간다.

“양심을 걸고 내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김치를 만들 거예요. 중국산 김치가 우리나라 식탁을 잠식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이럴 때일수록 김 치 고급화를 통해 종주국의 자존심을 지켜야 합니다. 대한민국 김치를, 또 한국의 전통과 혼 담긴 풍미김치를 많이 사랑해주세요.” 그녀에게 ‘김치는 내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