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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칼럼 - 사랑하려면 용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이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한 뒤에도 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만일 용서한다고 하면서 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진실로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최근에 있는 몇 가지 사례를 보면서 생각해 본다.
 
 첫 번째 사례는 인도네시아의 전 대통령 수하르토에 대한 것이다. 32년간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면서 잘 한 일도 많고 잘못한 일도 많은 것 같다. 아마도 우리나라로 치면 박정희.전두환 두 분 대통령을 합친 것 같은 공과가 있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놓았으면서 또 무력을 사용해서 많은 사상자가 따르는 진압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32년간 독재정치를 했으면서도 자연사 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일일뿐더러 그의 마지막 시간에 “이제 그만 『용서하자』”라는 목소리가 컸다는 것도 대단하다. 용서하자는 측에는 과거에 피해를 받았던 이들도 있고, 반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측에는 개인적으로 피해를 입은 적이 없었던 사람들도 있다. 즉 개인적 피해여부에 상관없이 각자의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의 딸은 눈물을 흘리며 부친이 통치 중에 행한 모든 오류와 죄를 용서해 줄 것을 호소했다고 한다.

 용서를 한다는 것은 죄와 잘못이 확정이 되어야 용서할 수 있다. 막연하거나 확인되지 않고 확정되지 않은 잘못에 용서를 해 줄 수는 없다. ‘죄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하여간 용서한다’는 것은 진지한 용서가 아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의 사정을 잘 모르면서도 ‘이제는 용서하자’는 움직임만 보고도 인도네시아인들이 예전의 비극과 원한을 이겨내는 위대한 국민으로 보이게 한다.
 
 우리도 과거에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러한 철권통치가 아니었으면 경제개발을 할 수 있는 짧은 가능성의 시대를 놓칠뻔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분들의 잘못을 제대로 따질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고 확정 지을 수가 없었고 따라서 제대로 된 용서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과거의 지도자”들을 용서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결과가 좋으니 과거 그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많은 면에서 국가 발전에 기여했고 우리나라를 세계 11위의 경제 강국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을 보아서 이제는 진정한 용서를 했으면 한다.
 
 두 번째 사례는 유명 탤런트의 이혼소송사건에서 보는 것이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밖에서 보기에는 완벽해 보였는데 실은 사랑이 식은 지 오래였다는 것이다. 부부의 성공적인 사회 생활, 또는 둘 사이의 자녀가 있다는 점 등은 이들의 사랑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다.

 이들 부부의 다툼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서로가 용서를 하기가 어렵겠구나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용서를 하려면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지 그리고 무엇에 대해 용서를 하는 지가 확실해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이유만 계속 찾을 뿐 서로가 잘못에 대한 인정을 하지 않으니 결국 용서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용서를 했다 하여도 다시 예전의 마음으로 돌아가 사랑을 할 수 있냐는 또 다른 문제임을 생각할 때 용서마저 할 수 없다면 사랑의 회복은 불가능하다.사랑이 사라진 가정을 법이 지켜줄 수는 없다.
 
 우리는 용서하는 법을 잘 모른다.

 때로는 서로의 잘잘못을 확실히 하지 않은 채 용서하는 시늉만 하기도 한다. 설사 용서 했다고 해도 잘못이 있기 이전의 과거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우리는 용서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용서는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에 그의 과거 잘못을 완전히 잊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사랑을 시작 할 수 있다. 또한 더 이상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서로 협조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용서는 과정이다.

 이 험난한 세상에 용서하는 법을 잘 깨우쳐서 우리 모두가 좋은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증오의 묵은 찌꺼기는 버려지고 분열의 상처는 아물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