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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검스님의 사찰음식-⑪>(끝) 한국 다맥과 다서(茶書)

대흥사 초의스님의 《다신전》과 《동다송》 유명, 한국 다맥 이어
다산 정약용의 《다신계절목》은 차와 제자간의 신의와 인연 소개
한국 차 정체성은 떡 차 전통, 차 재배 천년이은 강진.장흥 원조
일본 다도 보다는 우리 전통 차 문화 되살리고 다맥 제대로 계승

사찰음식은 먹는 것 마시는 것과 과일 등을 포함한다. 절에서는 식사(공양)를 하고 나면 차를 마시고 과일을 먹으면서 차담(茶談)이란 시간을 갖는다. 이제 갓 들어간 초보자인 행자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고참 스님들에게는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차담시간이다. 차를 마시고 과일을 먹으면서 도담(道談)도 하지만, 사찰 내의 대소사(大小事)를 논의하고 소통을 하는 기회다. 차도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다. 
 

절 문화에서 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객승(客僧)이 방문한다거나, 내빈이 왔을 때, 처음부터 방문목적을 바로 이야기 하지 않고 차 한 잔을 나누면서 서서히 이야기를 하게 된다. 특별한 목적이나 용건이 있어서 절을 찾는 분도 있겠지만, 그저 한번 들려 본 손님도 있게 마련이다. 이런 저런 이유와 목적으로 온 손님과 무난하게 대화를 하게 되는 매개체가 바로 차담인 것이다.

 

 
특히 중국의 선종불교(禪宗佛敎)에서는 사찰음식에서 차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역할도 컸다. 스승이 제자를 접견할 때, 차 한 잔 나누면서 제자의 수행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점검하면서 한 수 가르쳐 주기도 하고 경책도 했다. 그러므로 선원에서는 차가 항상 준비되어 있고 차담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다반사(茶飯事)란 말은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보통 있는 예사로운 일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란 말을 덧붙이기도 하는데, 날마다 반복되는 일이란 의미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선승들만이 아니고, 일본에서는 사무라이들도 차를 즐겨 마셨다. 차를 마시면서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기도 했다. 차담은 하나의 문화로 발전했고, 다도(茶道)가 생겨나게 됐다. 사실 다도는 한국이 원조인데, 일본식 다도가 서양에 소개되면서 다도하면 일본에서 생긴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차의식(茶儀式)이라고 해서 아주 고급문화로까지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에서는 이 차도(茶道)가 무로마치 시대(1336〜1573)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1568〜1603)에 확립되고, 차실(茶室)이 생겼다. 차실은 한 개의 방에서 출발, 나중에는 정원이 있는 제법 규모를 갖춘 저택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일본의 대형사찰에는 정원이 딸린 차실이 별도로 있을 정도였다. 한 절의 큰 스님이 주로 여기서 기거하면서 제자나 손님을 맞이했다. 그러므로 사회의 명사들은 이 차실에 와서 차를 마셔야 문화인 대접을 받기도 했다. 일본 근대기에 있었던 실화인데, 영국에서 아주 공부를 많이 한 학자가 선승이 기거하는 차실을 인사차 방문했는데, 앉자마자 서양문명과 문화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면서 자기 자랑을 계속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한 말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 때 나이가 지긋한 그 노선승은 그 학자의 찻잔에 차만 계속 넘치게 따르고 있었다. 그러자 학자 왈, “큰스님, 잔에 차가 넘치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큰스님께서는 “ 자네는 너무 아는 게 많아서 내 말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라고 하면서 “차나 한 잔 마셔!”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정말  차 한 잔을 가지고 큰 가르침을 준 것이다. 마음을 비워둬야 선승의 지혜가 들어갈 자리가 있는 법이다. 이처럼 차는 단순히 마시는 차원이 아니고, 하나의 문화요 교감이면서 소통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고려나 조선시대 사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일본에서처럼 활성화되지 못하고 산중 사찰에서 그 명맥을 이어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란을 겪으면서 이런 차 문화가 위축되고, 차는 주로 절에서 마시던 습성이 있었지만 조선의 성리학을 하는 유교문화에서는 차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오면서 차 문화는 강진 해남을 중심으로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역대고승들을 소개하는 《동사열전》이란 책이 있는데, 해남 대흥사에 살았던 범해각안(1826〜1896)이라는 스님이 지은 책이다. 여기에 보면 초의스님을 소개하고 있는데, 초의 의순 스님은 1786년에 태어나서 1865년에 입적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대흥사에서 함께 살았던 동시대인이기도 하다. 이 책에 따르면 초의선사는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을 두루 유람하였다고 했다. 추사 김정희(1786~1856)와도 깊은 교유를 할 정도였는데, 유서(儒書)와 차는 다산 정약용(1762〜1836)에게 배웠다고 했다. 
 

초의스님은 20대 때에 강진에 유배와 있던 다산에게서 유가경전과 시를 배웠고, 또한 차를 배워 알게 된 것이다. 그런가하면 글씨는 물론이지만 차에 일가견을 가졌던 추사와의 우정은 깊었다고 한다. 차로 말하면 초의 선사가 더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다산 정약용의 호가 다산(茶山)이듯이 다산 정약용은 차를 일찍이 알고 있었다. 
 

다산은 40세 때 천주교 문제로 강진에 귀양 가서 18년간 다산초당에 머물렀다. 18년간 500여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겼던 대학자였다. 그는 이곳에 머물면서 한 해에 수 백 근의 차를 만들어 마시고 주변에 선물했다고 한다. 다산을 통해서 조선의 차 문화가 다시 부흥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산 정약용을 한국 차 문화의 중흥조로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차와 관련된 네 권의 차서를 엮었다. 이 가운데 《다신계절목(茶神契節目)》은 18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에 앞서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神契)’란 친목 모임을 결성하면서 작성한 일종의 약조문이다. 
 

초의 선사는 《다신전》과 《동사송》을 저술했는데, 《다신전》은 초의스님이 1828년 여름 지리산 칠불아원에서 《만보전서》 내용 중, 차 관련 부분인 <다경채요(茶經採要)>를 필사하여 대흥사 일지암에서 《다신전》이란 제명으로 펴낸 것이다. 하지만 《동다송(東茶頌)》은 초의 스님이 직접 저술한 다서이다. 
  

《동다송(東茶頌)》은 본문만 68구 494자에 달하는 장시(長詩)다. ‘동다송’이란 동다(東茶)는 우리나라 차를 찬송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차 역사를 시로 정리한 것이다. 《동다송》은 우리 차 문화사에서 대단히 보배로운 저술이며, 초의 스님의 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해가 잘 녹아 있다. 초의 스님은 이 책을 저술하면서 중국과 한국의 다서를 참고삼아서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나는 어려서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 살았기에 작설차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다. 1960년대 주지 실에서 시봉을 하면서 서산대사 유물장 관리와 안내를 했었는데,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을 역임하신 청담 스님께서 자주 오셨고, 총무원장을 역임한 손경산스님 또한 자주 방문했다. 나는 다각(茶角:차 끓이고 대접하는 소임)의 일을 봤기에 이 분들에게 차를 끓여 올렸다. 
 

초의스님이 다맥을 전수 받았다는 응송 박영희 노장스님이 사하촌에 머물고 있기도 했다. 어렴풋이 응송스님이 초의스님의 다맥을 계승했다는 말을 들었고, 이후에는 대흥사를 떠나게 되어서 한동안 차를 잊고 있었는데, 최근 응송스님으로부터 다맥을 이은 백운스님에게 초의 다맥을 이은 법조스님을 만나게 되어 차를 자주 마시는 기회를 갖게 됐다. 
 

그동안 사찰음식을 연재하면서 음식에 치중해서 소개했으나, 차 또한 사찰음식으로서 절 문화에서는 빠질 수 없는 음료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특히 선원에서 차는 일상다반사로 마시면서 소화를 촉진하고 졸음을 방지하면서 좌선 삼매에 집중할 수 있다는 효험 때문에 차를 항상 마시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음을 알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