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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자의 민낯 취재] "유통기한 만이라도"...시각장애인 외면한 식품업체

식약처 점자 권장.독려...식음료업계, 비용부당 등 점자표시제 도입 전무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점자.음성변환용 코드 등 서비스 방법 다양"



[푸드투데이 = 황인선기자]  # 서울 성동구에 사는 A씨는 1급 시각 장애인이다. 난치성 안질환인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완전히 잃은 그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마트나 편의점에서 식품을 구매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저시력자인 B씨는 어느 정도 사물을 분간할 수는 있지만 확대 보조기기 없이는 물건을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시각장애인들이 제품명, 유통기한 등 최소한의 정보도 제공 받지 못하면서 소비자 보호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현행 소비자기본법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표시 방법의 기준을 정하고 있다. 소비자 기본법의 법률 제10조(표시의 기준)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이 물품 등을 잘못 선택하거나 사용하지 않도록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20조에 따른 시각장애인을 위한 표시방법에 대한 기준을 국가가 정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제4조에는 소비자의 기본적 권리에 물품 뿐 아니라 이를 선택함에 있어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어떤 제품을 먹는지, 어느 회사에서 만들었지 모른채 먹어요"

하지만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식품 중 식품정보를 점자로 표시한 제품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음료수, 맥주 캔 정도가 전부다. 그러나 이마저도 제품명 표기 없이 일괄적으로 '음료', '맥주'로만 표기돼 있거나 표시가 안된 제품도 있어 시각장애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재질에 따라 점자 규격이 있다"면서 "점자도 제대로 표기를 해야 인식할 수 있는데 그냥 돌기처럼 해 놓으면 되는줄 알고 규격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마트에 가서 음료와 맥주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음료, 맥주라고만 돼 있지 시각장애인들이 정작 알고 싶은 제품명, 유통기한 등 중요한 정보는 알 수 없다"면서 "점자가 있는 제품이더라도 규격에 맞지 않아 실제 읽지를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의약품은 관련 법안도 발의되고 안전상비 의약품을 중심으로 점자표시제 도입이 추진되고 있고 일부 삼푸, 린스 등 생활용품에는 점자 표시가 돼 있다"면서 "식료품은 아예 전무한 상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매일 섭취하는 식료품"이라고 덧붙였다.

때문에 시각장애인 대부분이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는데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시각장애인 C씨는  "내가 어떤 제품을 먹는지, 어느 회사에서 만들었지는지도 모른채 먹는다"며 "가족이나 활동 도우미 도움으로 내 입맛, 취향에 맞지 않은 것을 먹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선호하는 회사의 제품을 내 손으로 직접 구매하고 싶다"고 말했다.



"식약처, 기업 의지만 있다면"...업계 "포장자재 교체, 점자 찍는 비용 부담"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는 안전과 직결된 점자 표기의 제도적 기반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실적이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 업계의 일관된 견해다. 정부나 업계 모두 취지에는 공감하나 표시 방법, 비용 상승 등 현실적 한계가 있다는 것.

식품업계 관계자는 "점자를 표시하면 제품 생산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며 "종류가 워낙 많은데다 포장자재도 교체해야 하고 점자를 일일히 찍어 넣어야 하는데 비용 부담이 크다"고 이유를 설명하고 "생산 비용이 올라가면 제품 판매가격 인상도 불가피해져 그럼 소비자가격도 오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제품에 대한 가격을 지불하고 소비자로서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한다.

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비용 상승 등 이유로 불가피하다는 업계 주장)예전에는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핑계라고 생각한다"며 "유통기한 경우 건강하고 연결된 것이다. 점자.음성변환용 코드 도입 등 서비스 방법은 다양한데 식약처나 제조회사의 의지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국내에서 점자 표시 의무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7년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시각장애인들의 불편 해소 차원에서 '식품 점자 표시제' 도입을 검토한 바 있다. 당시 내용은 제조이름과 유통기한 등 표시사항을 생산의 일정부분 점자로 표시하도록 업체에 권고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를 반영한 업체는 없었다.

이후에도 여러차례 점자 표시제 도입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됐다. 2009년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아이스크림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주요 사항 점자표시 병행하도록 하는 '축산물의 표시기준' 개정안을 입안 예고했으며 자유한국당 박명재 의원은 2015년 의약품, 의약외품, 식품, 건강식품, 화장품 등 용기나 포장에 제품 명칭, 유통기한, 효능·효과, 용법·용량 등 상세정보를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로도 표기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최근에는 안전상비약을 시작으로 점자.음성을 표기하는 방안이 활발히 검토 중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정의당 윤소하 의원은 지난 4월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과 건강기능식품에 점자 및 음성변환용 코드를 의무적으로 적용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국회에서 점자표기에 관한 법안이 매년 발의되고 있지만 늘 제자리걸음이다"면서 "생명과 직결된 의약품 조차도 안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의약품 먼저 접근하고 식품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점자에 대한 규격을 제대로 지키면 좋겠지만 재질에 따라 안되는 것도 있다"면서 "재질에 따라 정 안될때는 가독성만이라도 확보 되면 된다. 시각장애인 소비자들이 어떤 정보를 원하는지 정말 가려운 곳을 긁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