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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46]富에 대한 판타지를 마신다...세계적인 부호 LVMH 아르노의 酒 ⓵

[푸드투데이 = 조성윤기자] “50년 후에도 아이폰 유저들이 존재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명품과 샴페인은 명맥을 이어갈 것이다”

 

늘 검은 폴라티셔츠에 청바지만을 고수하던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 애플의 창립자 스티브 잡스는 샴페인 돔페리뇽을 즐겨 마셨다.

 

스티브 잡스의 발언은 IT라는 것은 트렌드가 있어도 소모품이기 때문에 그 수명을 가늠하기 힘들지만, 하이 패션과 샴페인처럼 환상과 이미지를 판매하는 사업은 시대가 급변해도 수요가 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LVMH(Moët Hennessy Louis Vuitton)을 일궈낸 캐시미어를 입은 늑대

LVMH. Louis Vuitton, Moët & Chandon, Hennessy 한국에서 모조품의 역사가 가장 깊은 만큼 대중적인 브랜드 루이비통과 모엣, 그리고 샹동, 헤네시의 약자를 합친 세계 최대의 명품 기업이자, 프랑스 증시 시가총액 1위 기업인 동시에 유럽 증시 시가총액 1위 기업이기도 하다.

 

이 명품 제국의 수장은 75세의 베르나르 장 에티앙 아르노(Bernard Jean Étienne Arnault). 공개된 개인 재산이 한화로 약 307조 5000억원에 달한다. 아르노는 테슬라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를 제치고 세계 최고 부자 1위에 등극했다.

 

블룸버그에서 공개한 억만장자 지수에 따르면 아르노의 자산은 프랑스 GDP 5% 이상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또,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전 세계 최고 부자에 등극한 것은 아르노가 처음이다.

 

아르노는 프랑스 소도시 루베의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1971년 경영 수업을 받은 후 아버지에게 대표직을 물려받았다. 1981년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당선되자 미국행에 오른다.

 

사회당은 기업가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택시 기사에게 “프랑스 대통령의 이름을 아느냐”고 묻자 “프랑스 대통령의 이름은 몰라다 크리스찬 디올의 이름을 안다”는 답을 듣고 미래 먹거리는 하이패션이라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1984년 프랑스에 다시 돌아온 아르노는 당시 크리스찬 디올의 모그룹이었던 부삭(Boussac)이 프랑스 정부가 매각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르노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토록 싫어했던 사회당 고위 인사들에게 로비를 벌이고 당대 전설적인 은행가였던 앙투안 베른하임에게 대출을 받아 부삭 인수자로 결정됐다. 미국에서 부동산 사업을 하던 아르노는 자신의 회사보다 20배나 큰 회사의 주인이 된 것이다.

 

루이비통을 버리고 잡은 기네스의 손

루이비통과 모엣헤네시는 합병직후 LVMH의 초대 회장이 된 것은 회사 규모와 지분이 컸던 모엣헤네시의 CEO 알랭 슈발리에였고, 루이비통의 라카미에는 수석 부사장을 맡으면서 불편한 동거에 들어가게 됐다.

 

하지만 업종이 다른 만큼이나 성향 달랐던 두 기업의 합은 쉽지 않았다. 슈발리에와 라카미에는 LVMH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아르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같은 패션업계에 있던 루이비통은 먼저 아르노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회라고 생각했던 아르노는 1987년 블랙먼데이 사태로 세계 주가가 폭락한 틈을 타서 LVMH의 주식을 사들이며 지분을 확보에 주력했다.

하지만 모엣헤네시의 뒤에는 기네스라는 막강한 조력자가 있었다. 끝까지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유리할지 고민하는 아르노는 다시 한 번 부삭그룹 인수전 때 도움을 받았던 은행가 앙투안 베른하임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는 아르노에게 “엄청난 자본력으로 무장한 기네스와 적을 두게 된다면 오히려 당신이 잡아먹힐 것”이라는 답을 듣고 모엣헤네시의 편에 서게 된다.

 

루이비통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아르노는 지분 인수 후 모엣헤네시의 슈발리에 회장마저도 몰아낸다. 그리고 40세의 나이에 1989년 자신이 LVMH 그룹 회장 및 최대주주 자리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