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햄프셔주 고프스타운에서 귀금속 세공 일을 하는 크리스토퍼 포든은 아침 최저기온이 여전히 영하를 넘나드는 요즘 다섯 식구가 사는 집에서 더운 물을 쓰지 못해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지난 겨울 기름값만 3000달러(약 300만원)가 들어갔지만 결국 535달러가 연체됐고, 석유 판매회사는 날씨야 어쨌든 시간적으로 봄철이 됐다는 이유로 연체금을 갚아야 연료 공급을 재개하겠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 교외에 사는 기 탈포와 안네 르나르는 최근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했다.
우체국 직원인 탈포와 교사인 르나르의 연봉을 합하면 4만유로(약 6200만원)으로 부족하다고는 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법적으로 부부가 되면 세금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들의 속사정이다.
세계적으로 석유와 원자재는 물론 식료품 가격까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이제 물가 상승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 주민들마저도 춥고 배고프게 만들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를 비롯한 미국 언론에 따르면 오는 9월까지인 미국의 2008 회계연도에 연료 보조금을 지급받는 미국인은 최근 16년래 최고인 580만명으로 예상되고 있다.
불과 2∼3년 전에 1갤런(약 3.8ℓ)당 2달러대였던 미국의 휘발유 가격은 현재 3.6달러를 기록하고 있고 일부 주유소에서는 4달러에 근접한 가격표가 나붙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미국인 1008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1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 최근의 석유 가격대가 ‘위기 수준’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전체의 42%,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 사람이 51%였다.
일반시민 생활비 부담 가중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에서 빈곤과 배고픔은 이제 더 이상 노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지적하며 현재의 식량 가격 상승세가 이어지면 수백만명의 미국인이 기아에 직면할 것이라고 최근 전망했다.
미국 정부 집계에서도 2005년에서 2007년 사이에 전체 식료품 가격은 6.0% 올랐고 특히 달걀 가격은 35.5% 폭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농무부는 올해에만 식료품 가격이 4∼5% 더 오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 1일 의회에 세계 각국에 대한 긴급 식량원조 자금 7억7000만달러가 필요하다고 요청했지만 다른 나라보다는 나라 안부터 돌아보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상당수다.
캐럴린 맬러니 미국 하원의원은 이날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이 신선한 고기와 야채 대신 값싼 파스타와 통조림 식품을 먹기 시작했다며 “몇몇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리세션 다이어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꼬집었다.
미국 의회는 이미 식량보조권(푸드 스탬프)을 배급받는 미국인이 2009회계연도에 사상 최고치인 2800만명을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세계은행은 지난 3년동안의 식량가격 상승률을 최고 83%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아이티와 이집트, 인도네시아 같이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국가에서는 이미 식료품 가격 상승을 감당할 수 없어진 주민들이 이미 소요 사태를 일으켰다.
이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노동절 집회에서 상당수의 참가자들은 ‘생활비 상승대책 마련’을 거세게 요구했다.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의 노동절 집회에서는 국가 발전을 위해 정부와 노동자가 단결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주를 이뤘던데 비해 지방 도시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갈수록 힘겨워지는 생활 여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노동절 집회에 모인 2만5000여명의 참가자들은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임금 인상을 자제해야 한다는 정부와 기업의 주장이 “우리에게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강요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처럼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지만 정부 차원에서 내놓을 만한 확실한 대책이 없다는 게 미국은 물론 유럽 정책당국의 고민이다.
신용위기 타개를 위해 이미 기준금리를 2.0%로 끌어내린 미국에서는 낮아진 금리로 인해 물가 상승세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비판이 팽배해 있고, 유럽중앙은행(ECB)은 유로화 사용국 주민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물가 부담 때문에 기준금리를 올리지도, 내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상태다.
식료품 가격 상승 속수무책
국제유가 상승이 국제 투기자본의 움직임 때문에 유발된 측면이 있었던 것과 달리 공급 부족과 수요 증가가 맞물려 식량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점은 정책 결정자들의 고민을 증폭시키고 있다.
바클레이스 캐피탈의 팀 본드 연구원은 1일 발표한 투자보고서에서 밀과 옥수수 가격이 잇따라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지만 이를 투기 자본의 개입 때문으로 볼 수 없으며 투기 거품에만 원인을 돌린다면 식료품 가격 상승에 아무런 대처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이렇게 되자 일부 미국인들은 전쟁이나 대규모 자연 재해가 벌어졌을 때나 있을 법한 ‘사재기’에 나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에서 중산층 주민들이 육류 가격 상승을 걱정한 나머지 잇따라 자기 집 뒤뜰에 커다란 냉장고를 설치하고는 고기를 마구 사들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매사추세츠주 브루스터에 사는 한 부동산 중개업자도 대형 냉장고를 새로 산 다음 냉동식품들로 가득 채웠고, 뉴욕주 코틀랜드에 사는 한 전직 교사는 자신의 집 근처에서 개당 4.3달러이던 시리얼을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개당 3달러에 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장 달려간 다음 무려 15상자를 사들였다.
미국에서는 1970년대에 사재기 현상이 있었지만 1980년대부터 유통업계의 경쟁이 본격화되며 안정적으로 낮은 가격의 식료품이 공급되자 사재기는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사회복지 담당자들은 물론 식품업계 관계자들마저도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중산층 이상 주민들만이 사재기를 해서라도 식료품 가격 상승에 대응할 수 있을 뿐이며 점점 더 많은 저소득층이 기아 선상으로 내몰릴 것이라는데 대체로 일치된 의견을 보였다.
굶주림 쓰나미 빈곤국 아사 상태
WEP “수백만 인구 절망적 상황” 밝혀
식료품값 고공비행 빈국 어린이 치명타
지난 3월 이집트 수도 카이로 남부의 헬완.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어린이들의 싸움이 집안간 총격전으로 비화돼 2명이 죽고 9명이 다쳤다.
북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빵 가게의 주인이 새치기 했다고 서로 다투는 주민들을 말리다 칼에 찔려 숨졌다.
아프리카 카메룬에서는 2월 한달동안 폭동으로 40명이 목숨을 잃었다.
모두 식품가격 폭등으로 빚어진 일이다.
‘굶주림의 쓰나미’가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다.
쌀을 비롯해 식품 가격이 폭등하면서 지구촌 곳곳에서 “배고파 죽겠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오고 있다.
유엔은 식량 위기를 전 세계 1억명 이상을 굶주림으로 내모는 ‘소리없는 쓰나미’라고 경고했다.
조셋 시런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사무총장은 지난달 22일 런던에서 열린 국제 식량위기 대책회의에서 “식량 위기는 25만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1000만명의 난민을 야기한 (동남아) 쓰나미(지진해일)에 비견할 수 있다”면서 “이미 수백만명이 절망적 상황”이라고 말했다.
식량 위기는 빈국 뿐 아니라 신흥 경제대국으로 각광받는 중국 등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중국 상하이(上海) 이마트 취양(曲陽)점. 중국인들이 가장 즐겨 먹는 육류인 돼지고기(500g) 가격은 11.8위안으로 1년 전(8.6위안)보다 37.2%나 뛰었다.
식용유(5ℓ)는 지난해 4월 38위안에서 최근 62위안으로 1년새 63.2% 급등했고, 쌀(500g)은 1.29위안에서 1.49위안으로 15.5% 상승했다.
중국 정부는 안정적인 식량 공급을 위해 해외 농장을 적극 확보하기로 하는 등 13억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특히 치솟는 식품 가격은 아시아,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WEP, 예산부족 급식중단
WFP는 최근 캄보디아 빈곤 학생들에 대한 아침 급식을 중단했다.
WFP는 캄보디아의 가난한 학생 45만명에게 아침 급식을 제공해왔으나 올들어 국제 쌀값 폭등으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자 급식을 중단한 것.
전 세계 12개 빈곤국 가운데 하나인 캄보디아는 하루 50센트 미만으로 살아가는 인구가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캄보디아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몰아닥친 국제 식량 위기로 쌀값이 지난해 t당 300달러에서 최근 700달러로 두 배 이상 치솟았다.
WFP는 타지키스탄, 케냐에서도 학교 급식 프로그램을 축소한 상태.
유니세프에 따르면 인도의 3살 이하 어린이 중 절반이 영양실조 위기에 처해 있다.
북한의 식량난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마커스 놀랜드 선임연구원은 지난달 30일 ‘북한 식량위기’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북한은 10년 전 기근 사태가 끝난 이후 가장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도 지난달 22일 WFP를 인용해 “지난해 홍수 피해 등으로 북한의 곡물 수확량이 25% 감소했다”며 “올해 심각한 기근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도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물가 폭동과 식량난으로 안보까지 위협받고 있다.
카메룬에서는 지난 2월 한달 동안 물가 폭등에 항의하는 폭동으로 4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코트디부아르, 모리타니, 세네갈, 부르키나파소 등에서도 시위가 잇따랐다.
아프리카 국가들 폭동 빈발
식량 위기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면서 각국 정부도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최근 쌀 사재기 소동으로 한바탕 몸살을 치른 세계 2위의 쌀 수출국 베트남에서는 정부가 지난달 28일 쌀 사재기 금지령을 내렸다. 또 “국내소비를 충당할 만큼 넉넉한 쌀을 보유하고 있으며 수출물량도 충분히 확보돼있다”는 내용의 특별 성명을 발표하며 민심 수습에 나섰다.
필리핀 정부는 수도 마닐라 거주자 가운데 소득 하위 33%에 해당하는 저소득층에 ‘쌀 카드’를 배포하기로 했다. 이 카드가 있으면 정부 보조금을 지급받은 쌀을 일반미의 절반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저소득층이 쌀을 부담없이 사먹을 수 있도록 국내 생산 쌀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세계은행은 “식량 가격이 계속 오를 경우 전 세계 33개국에서 소요사태가 예상된다”면서 “국제적 지원이 늘어나지 않으면 1억명 가까운 사람들이 더 심각한 빈곤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