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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식품 ‘신호등 표시제’ 진통

정부, 갈팡질팡 탁상행정에 혼란

소비자 중심 보완책 마련 시급…업계, '영양성분 표시제' 선호

어린이들이 먹거리 식품을 선택할 때 쉽게 영양정보를 파악해 올바른 식습관을 형성하고 비만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주자는 취지로 어린이식품 ‘신호등 표시제’가 발의된지 4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 동안 여러 문제점이 제기돼 소모적인 논쟁만 커진 가운데 정부는 갈팡질팡하며 당초 취지와 달리 혼란만 가중되고 있다. 소비자와 식품업계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정부의 정책 보안이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 정부, 발의부터 의무화까지 갈팡질팡
‘신호등 표시제’는 식품에 신호등 색깔인 빨강·노랑·초록 색깔을 표시해 영양성분에 대한 위험성을 알리는 제도다. 표기되는 영양성분은 당·지방·포화지방·나트륨 등 네 가지로 각각 일정 수준 이상이면 빨강, 보통이면 노랑, 낮은 수준이면 초록색으로 표시한다. 예컨대 탄산음료의 경우 당류에 빨간색이 표시되고, 지방·포화지방·나트륨은 초록색으로 표시된다.

‘신호등 표시제’는 지난 2008년 8월 어린이 기호식품에 영양성분 함량 등급을 정해 신호등 색깔로 표시, 식품 선택에 도움을 주자는 취지로 안홍준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어린이 식생활안전관리 특별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발의한 데서 비롯됐다.

이후 2010년 3월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이 어린이들이 과자 등 기호식품을 선택할 때 보다 건강한 식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어린이 기호식품 영양성분의 함량 색상, 모양 표시 기준 및 방법’으로 ‘신호등 표시제’를 고시하고 2011년 3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하지만 식품업계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부딪혀 시행 7개월만인 2011년 10월 ‘어린이 기호식품 신호등제 폐지’ 추진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당시 법안 내용이 한국식품산업협회 측 롯데제과의 주장과 동일해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가 있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정부는 결국 2011년 말 “신호등 색깔로 영양 성분 함량을 표시하는 게 정보 전달에 한계가 있다”며 대신 숫자로 표기하는 ‘영양성분 표시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어린이 식생활안전관리 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해 ‘신호등 표시제’를 사실상 폐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기도 했다.

그러다 정부는 다시 지난 5월 25일 김황식 국무총리 주재로 국가정책조정회의를 개최하고 어린이 기호식품 안전성 개선방안을 확정하면서, 현재 권고사항인 ‘신호등 표시제’를 어린이의 섭취가 잦은 과자류와 음료류부터 우선 의무화해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난 7월에는 국회에서도 안홍준 새누리당 의원이 다시 '신호등 표시제'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담은 '어린이 식생활안전관리 특별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안 의원은 "어린이 기호식품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지난 2009년 3월부터 신호등 표시제가 권고사항으로 도입됐지만, 식품업체의 참여 부족으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면서 법안 발의 배경을 설명했다.

11월 들어 정부도 ‘신호등 표시제’ 의무화에 있어 어린이의 섭취가 잦고 고열량·저영양식품 비율이 높은 과자와 음료에 대해 과자는 2014년, 음료는 2015년에 단계적으로 의무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식품업계, 롯데제과 등 시행 전부터 줄곧 반대…‘영양성분 표시제’ 선호
식품가공업계에서는 ‘신호등 표시제’가 시행되기 전부터 줄곧 강력히 반대해 왔다. 식품업계에서는 ‘신호등 표시제’가 영양성분 등에 대해 명쾌한 정보를 주는 제도가 아니며 판매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결국 풀무원과 당시 훼미리마트에서 일부제품에 대해 ‘신호등 표시제’를 도입하고 있을 뿐 롯데제과, 해태제과, 오리온 등 어린이 기호식품을 생산하는 식품업계 대기업과 한국유가공협회 측은 끝내 이를 도입하지 않았다.

각 식품업체들 스스로 판단해 도입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한국식품산업협회를 중심으로 다같이 표시하지 않는 분위기다. 일부 포장지에 찍히는 동판을 맞추기 어렵다는 등 소소한 핑계들로 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식품업계에서는 ‘신호등 표시제’를 도입하지 않는 이유로 ▲ 지나친 단순화로 식품의 영양정보를 왜곡한다 ▲ 고품질 원료의 사용을 저해할 수 있다 ▲ 어린이 구매가 많은 학교 앞 저가식품들이 녹색으로 표시된다 ▲ 어린이들이 필요로 하는 영양 차이를 반영하지 못한다 ▲ 신호등 색상 기준에 충분한 근거가 없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 정부의 규격대로 만든 제품도, 정부가 품질을 인증한 제품도 적색으로 표시된다 ▲ 세계로 수출되는 우리 제품들이 적색 마크를 달게 된다 ▲ 신호등표시제 의무화로는 비만을 해결할 수 없다 ▲ 좋은 식생활 교육과 실천을 위한 범국민적 노력이 먼저이다 ▲ 이러한 이유로, 신호등표시제를 의무화 하는 국가는 전 세계에 단 한 곳도 없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롯데제과는 ‘신호등 표시제’가 영양성분 등에 대해 명쾌한 정보를 주는 제도가 아니라며 단지 ‘영양성분 표시제’에 대해 기획부와 회의를 거쳐 도입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오리온도 ‘신호등 표시제’가 실효성이 없다고 보고 초콜릿류는 모두 빨간색으로 표시돼 판매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제도 도입을 꺼리고 있다. 반면 새로 도입된 ‘영양성분 표시제’는 포장재가 소진되는 시점을 기해 적극적으로 도입하겠다는 입장이다.

한국식품산업협회 관계자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신호등 표시제’보다 건강에 밀접한 영양성분 몇 가지를 가독성을 높여 앞면에 표기하는 ‘영양성분전면 표시제(GDA)’를 우선 도입하기 위해 업계가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 식약청, “대기업에서 어린이 건강을 생각지 않고 매출에만 급급”
식약청에서는 식품가공업계들이 반대하는 것은 특히 빨간색으로 표기되는 제품으로 인한 매출 감소가 가장 큰 이유라고 업계에 화살을 돌렸다.

식약청은 “어린 자녀들의 건강을 위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다들 기대를 걸었는데 협조적인 태도로 나오는 기업이 거의 없어 고민”이라며 “기업 오너들이 결단해야 할 문제”라고 전한 바 있다. 대기업이라면 매출을 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린이 건강에 대해서도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주기를 강조하고 있는 입장이다.

식약청 관계자는 정부의 '신호등 표시제' 의무화에 대해 "이해 당사자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검토 후 단계적 의무화를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 소비자, “알권리 무시”…현실과 괴리있는 ‘신호등 표시제’ 보완 필요
정부의 정책과 업계의 목소리가 엇박자로 이어지자 소비자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부모들은 어른도 숫자로 표시된 영양 성분 함량만으로는 몸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게 쉽지 않다고 지적하고, 식품업계가 얄팍한 계산으로 기본적인 사회적 책무를 저버리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식약청에서 ‘신호등 표시제’를 도입한 취지는 좋았으나 현실과 괴리가 있고 기업에서도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국민건강보다는 매출만을 생각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대기업과 정부 모두 문제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소비자단체들은 새로 도입될 ‘영양성분 표시제도’에 대해 사실상 제품 뒷면에 제시된 식품함량 표시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신호등 표시제’는 영국의 경우처럼 소비자들의 경각심을 고취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지만 ‘영양성분 표시제’는 제품 뒷면에 제시된 식품함량 표시제를 단순히 제품 앞면에 배치시키는 것뿐이라고 꼬집었다.

◇ 성급한 추진보다 정책 보완이 선행돼야
4년째 답보 상태에 놓여 혼란만 가중되고 있는 ‘신호등 표시제’에 대해 정부는 성급한 추진보다 ‘신호등 표시제’의 취지를 살려 어린이도 쉽게 영양 성분 함량을 따져 볼 수 있는 보완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여러 종류의 식품을 다양하게 섭취해 하루 필요한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단순히 식품 하나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식단의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도 있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의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식품 구매 시 중요하게 보는 식품 표시는 유통기한·가격·원산지가 각각 1·2·3위이고 열량 및 영양성분을 확인하는 비율은 3.5%에 그쳤다. 때문에 식품의 열량 및 영양성분 표시의 가독성을 높이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식품에 적용하는 영양성분 표시는 매우 보편적이며 합리적이어야 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돼야 할 것이다. 정부는 한쪽 면만 지나치게 강조해 제도를 성급히 추진하기보다 보완책이나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