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도 많은 팬이 있는 미국 TV 시리즈 '빅뱅 이론'에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괴짜 과학도가 바나나를 액체 질소에 재빨리 얼린 후 망치로 산산조각내 시리얼에 넣어 먹는 장면이 나온다. 바나나를 잘게 자를 칼이 없었다는 것이 이 거창한 조리법의 이유였다.
이 장면을 보고 '먹는 것 가지고 장난하면 못 쓴다'며 혀를 끌끌 차는 어른도 있겠지만 사실 시간과 온도의 예술인 요리와 과학은 무척 가까운 사이다.
'괴짜 과학자, 주방에 가다'는 '빅뱅 이론'의 주인공들과 닮은 호기심 많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자 요리 애호가인 제프 포터가 쓴 독특한 요리책이다.
스스로도 괴짜라고 인정하는 저자가 조리에 앞서 들려주는 여러 가지 사항들은 지나치게 세심해 살짝 피곤하기까지 하다.
가령 연산의 순서에 따라 답이 달라지듯 요리책에 나온 조리법에서 '초콜릿 3큰술을 다진다'와 '다진 초콜릿 3큰술'은 엄밀히 말해 똑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한 컵의 분량은 미국 237㎖, 영국 284㎖, 한국과 일본 200㎖로 큰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것까지 따져가며 어떻게 요리하겠냐고 한숨을 쉴 독자들에게 저자는 "저녁식사를 태워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저녁이 결국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 해도 만약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배웠다면 성공"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격려를 바탕으로 저자는 이 책에서 오븐 눈금 보정하기부터 재료 손질과 보관, 부엌 정리와 배치, 조리의 기본 변수 등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조리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시간과 온도다. 감자를 굽는 데는 177℃에서 30분, 피자는 230℃에서 10분, 아이스크림을 젓는 데는 영하 29℃에서 1시간 등 맛있는 조리를 위해서는 알맞은 시간과 온도의 결합이 필요하다.
이 조합에서 온도를 극대화해 짧은 시간에 조리하는 방법도 있다.
바나나를 냉동실에서 천천히 얼리는 게 아니라 액체질소에서 순식간에 얼려버리고 얇은 피자를 높은 온도에서 금세 굽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조리시간을 극한으로 바꿔보는 것도 가능하다.
식품을 정확히 온도가 조절되는 수조에 담가 조리하는 '수비드 조리법'이 그 경우인데, 고기를 비닐 봉투에 넣어 진공 포장한 후 55℃의 물 속에 2시간 담그면 골고루 잘 익은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가 완성되는 식이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과학 원리를 적용시킨 흥미로운 조리 팁들이 제시된다.
책 중간중간에는 '나는 왜 과식하는가'의 저자인 브라이언 완싱크 미국 코넬대 교수, 주방용품 제조회사의 간부인 벅 레이퍼, 뉴욕의 파티시에 마이클 레이스콘니스, 분자조리학자 에르베 티스 등 요리와 관련된 여러 인물들과의 인터뷰도 수록됐다. 원제는 'Cooking for geeks'
이마고 펴냄 / 제프 포터 지음 / 김정희 옮김 / 363쪽 / 1만7000원.